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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들로 둘러싸인 방

나는 지금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로 둘러싸인 방 안에 앉아 있다. 읽지 않은 책들로 둘러싸인 방 안에 앉아 있으면, 책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 느껴지고, 마침내 나는 수없이 많은 말들의 일렁거림, 그 침묵 속에 침잠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점점 넓어지고 깊어지는 침묵의 바다에 수장당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아무 책이나 꺼내 펼친다. 그리고 그것을 읽는다. 그리고 이내 그것을 잊는다. 끝내 그것을 잊을지라도, 아무 말없이 그저 읽는 것만이 유일한 길임을, 나를 둘러싼 시선은 내게 침묵으로써 말을 건넨다.

어느푸른저녁 2022.11.30

새는 노래하는데 고양이는 왜 우는걸까

밥을 먹으러 간 식당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일단 대기표 작성을 하고 대기하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 새장이 있었다. 새장 안에는 색색의 잉꼬가 다섯 마리 있었는데 한 마리가 유독 큰 소리로 지저귀고 있었다. 나는 무심결에 새가 짖고 있네,라고 중얼거리다가 아차 싶어서 새는 지저귀는 거지,라고 생각했는데, 개는 짖고, 새는 지저귀고, 고양이는 울고... 까지 생각하다가, 그런데, 왜 고양이는 우는 거지? 싶었다. 새는 노래하는데 고양이는 왜 우는 걸까? 내가 고양이라면 좀 억울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밥을 먹었다.

어느푸른저녁 2022.11.30

사로잡힌 자와 사로잡는 자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표현은 누가 가장 먼저 사용했을까. 뛰고 있는 심장, 살아 있는 것을 사로잡았을 때와 그렇게 사로잡혔을 때의 감정을 잘 아는 자인 그들은 사냥꾼이었을까. 그들이 따뜻한 새끼 사슴이나 토끼를 사로잡듯이. 그들은 희생물의 눈동자 속에 자기 자신을 최초로 이입시킨 자. 어디에도 출구가 없음이 너무나 명백하여 차라리 달콤하기까지 한 절대절망의 상태를 자신 안에서 상상으로 그려 보인 자. 그것을 표현이라는 방식으로 재현해낸 자들. 그렇듯 그것은 어쩌면 사로잡힌 자가 아니라 사로잡는 자들에 의해서 탄생했으리라. 이미 사로잡힌 자들에게는 사실상 노래할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므로.(84~85쪽, 배수아, 「북역」 중에서(『올빼미의 없음』 수록)) * '사로잡힌 자와 사로잡는 자' 문득 오래전..

어느푸른저녁 2022.11.30

미묘에 대하여

* 일본의 나무들, 숲들.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아 보이는, 하지만 분명히 다른, 그런. 나는 일본의 도심 풍경도 좋았지만, 어쩔 수 없이, 산과 숲, 나무가 인상에 남았다. 그리고 '미묘'라는 단어에 대해서 오래도록 생각했다. 미묘하게 다른 사람들, 나무들, 숲들에 대해서. 오래전 처음으로 일본에 갔을 때 느꼈던 '미묘'와는 '미묘'하게 다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지만. * 일본의 어느 작은 마을길을 걷고 있는데,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그 순간 내가, 아주 오래된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 일본은 자연을 제외하고 모든 것들이 다 작아 보였다. 방의 크기, 화장실과 욕실의 크기, 자동차의 크기, 음식의 양 등. 반면 일본의 자연은 광활하고..

토성의고리 2022.11.27

잠자는 남자(un homme qui dort)

"시간의, 하루하루의, 주의. 계절의 저 흐름에 맞추어, 너는 모든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분리시킨다, 너는 모든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떼어낸다. 너는, 네가 자유롭다는, 그 무엇도 너를 짓누르지 않는다는, 네 마음에 들지도 않고 들지 않는 것도 아닌, 일종의 취기를, 가끔이다시피 할 정도로, 발견하곤 한다. 너는, 마모되지도 않고 가벼운 흔들림도 없는 이와 같은 삶 속에서, 트럼프나 다소간의 소음이, 네가 너 자신에게 제공하는 다소간의 스펙터클이 마련해주는 이 유보된 순간들을, 매력적이고, 이따금 새로운 감동으로 부풀어 오르기도 하는, 완벽한 것이나 거의 다름없다시피 한 행복 하나를 찾아낸다. 너는 완전한 휴식이 무엇인지 안다, 너는, 매 순간, 절약되고, 보호된다. 너는, 그 무엇도 네가 기대하지 않는..

오후4시의희망 2022.11.26

꿈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꿈이 되고

네가 보내준 카프카의 『꿈』을 받고 나서 나는 좀 흥분했다. 내가 생각하던, 내가 언젠가는 쓰고 싶다고 생각하던 형식과 매우 흡사한 책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마도, 앞으로 내가 쓸 글에 큰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고 예감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카프카의 『꿈』이라는 작품이 아니라, 카프카의 일기와 메모, 편지와 산문 등의 글에서 꿈과 관련된 부분만을 따로 모아 편찬한 것이다. 책장을 펼치자, 서문의 시작은 이랬다 :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길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한 마리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변신의 첫 문장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의 강력한 암시처럼 독자에게 다가온다. 이 소설이, 사실은 주인공들이 꾸는 악몽이거나 혹은, 악몽에 시달리다가 깨어난 카프카의 머리에 떠오..

어느푸른저녁 2022.11.15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

일요일 아침 조조로 영화를 보았다. 러닝 타임이 무려 두 시간 사십 분이다. 나는 세 시간 가까이 되는 영화의 러닝 타임이 내게 어떻게 다가올까 궁금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나는 이 영화의 소개나 리뷰, 평점 등을 전혀 보지 않았다. 그러다 영화 시작하기 전에 쿠키 영상이 몇 개나 있나 싶어 찾아보다가 평점과 짤막한 리뷰들을 보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없고 지루하다는 평이 많았다. 나는 예고편만을 보고 무척 기대를 하고 왔는데, 극과 극의 평점을 보다 보니 머리가 다 어질어질했다. 그러니까 재밌다고 한 사람들의 평점은 거의 10점에 가깝고, 재미없다고 한 사람들의 평점은 거의 1점에 가까웠다. 1과 10 사이에서 나는 과연 어떤 점수를 줄 수 있을지 스스로 ..

봄날은간다 2022.11.13

올랜도

오래된 비밀 하나 말해줄까, 나는 사포였다 다시 태어나는 조건으로 나의 뮤즈, 내 자매들을 신에게 헌납했다 그러나 욕망은 악착같은 것 모든 재능이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다 쓰지 않는 손이 줄 끊어지는 순간의 악기처럼 떨린다 나는 잿빛 고수머리, 칼날을 쥔 유디트였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 모든 용기의 목을 잘라 삶에게 가져갔다 그래도 희망은 여인 곁에 누워 있다 이 빠진 노파의 쭈그러든 젖을 빨며 울다 잠든 아기처럼 나는 햄릿이 사랑한 요릭 다시 태어나려고 익살을 전부 팔았다 질문은 핵심을 비껴간다, 안와에서 빠져나간 눈알처럼 껍질을 부수지 않고 노른자를 맛보려는 왕들은 어찌 가르쳐야 하나요 죽음의 간을 맞추려고 마지막 풍자까지 써버렸는데 나는 해운사에 취직한 이스마엘 배를 탔다, 하늘은 붉고 시간은 흰 돛..

질투는나의힘 2022.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