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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소마

의 아리 에스터 감독의 두 번째 영화인 를 보았다. 예전부터 보고 싶었지만, 계속 미루다가 이제야 보게 되었는데, 만약 못 보고 지나갔다면, 상당히 독특한 공포영화 한 편을 놓칠 뻔했다. 우연찮게도 최근에 본 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던 플로렌스 퓨가 주인공 '대니'역을 맡았다. 감독의 전작인 은 상당히 '어둡고' 독특하면서도 섬뜩한 공포영화였다면, 는 상당히 '환하고(?)' 독특하면서도 섬뜩한 영화였다. 이 영화는 스웨덴의 외딴 마을에 종교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벌이는 축제에 대니와 친구들이 참여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북유럽 특유의 백야와 이단적인 종교의식이 이방인들의 눈에는 낯설게만 보이는데, 그것이 정작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사실..

봄날은간다 2021.08.30

비가 오다, 비가 내리다

* 비가 오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작년처럼, 소가 지붕 위에 올라갈 정도의 폭우는 아니지만, 줄기차게, 정말 지치지도 않고 며칠째 계속 비가 내린다. 작년 이맘때 나는 '지붕 위의 소'라는 제목으로 짧은 글을 썼었다. 느닷없이 온 비로 소가 떠내려가다가 급기야 지붕 위에 올라가게 된 웃지 못할 뉴스를 접하고 쓴 글이었다. 지붕 위의 소를 지상으로 내리기 위해 크레인이 동원되고, 온몸이 줄에 감긴 채 땅으로 내려온 소들은 제 발로 서지를 못하고 자꾸만 옆으로 쓰러졌다. 그 소들의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그게 벌써 일 년 전의 일이라는 사실 또한. * 올해는 작년처럼 그렇게 유별난 비는 아니지만, 우중충하고 지루한 비가 며칠째 계속되니 좀 답답한 기분이 든다. 어제는 점심 때 잠깐 햇살이 비췄는데,..

어느푸른저녁 2021.08.26

백민석, 《목화밭 엽기전》, 한겨레출판, 2017.

우리 속의 맨드릴 원숭이는, 암수 한 쌍이고 나이도 비슷했다. 그는 그런 둘이, 신방을 차리기는커녕, 암컷이 절대로 수컷 가까이는 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우리가 좁아 한 놈이 바닥을 돌아다니면 한 놈과 저절로 부딪치기 마련이었다. 둘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서 있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암컷은, 수컷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될 때면, 철골 구조물을 타고 우리 꼭대기로 훌쩍 올라가버렸다. 암컷과 수컷 사이에 무슨, 안전거리 규정 같은 것이 있는 듯했다. 안전거리는, 육체를 가진 생물이면 어느 것에나 있는 것이었다. 육체란, 공간이라서 그렇다. 해수 속의 박테리아부터, 사우나탕 휴면실에서 잠잘 자리를 찾는 발가벗은 사내들까지. 그 살아 있는 공간인 육체는 항상, 타생물과의 일정한 거리를 필..

블랙 위도우

* 내가 생각했던 바는 아니었으나, 딱히 나쁘지는 않았다. 처음, 이 영화가 그리 끌리지는 않았는데, 그건 블랙 위도우가 매력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최후가 어땠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미 그의 죽음을 보았다. 그건 아쉽지만 아쉬운 대로 나름 완벽한 결말처럼 보인다. 하지만 너무나 완벽해서 인위적인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가장 깊은 죄의식을 가져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를 너무나도 손쉽게 결정지어 놓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건 나만의 망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언맨의 죽음만큼이나 블랙 위도우의 죽음 또한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은 계속 남았다. 에서 블랙 위도우는 그렇게 슬퍼할 틈도 없이 불쑥 사라져 버렸으니. 그래서였..

봄날은간다 2021.08.17

소리 없는 재앙의 예감(제발트, '자연을 따라. 기초시')

어떤 사람은 매혹당할 운명으로 태어나 문학을 사랑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그는 마지막 날까지 자신을 매혹시킬 것을 찾아서 헤맨다. 문학을 헤매는 것은 여행지를 헤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는 문학이라는 외국에서 영영 머문다. 독자란 끝내 알지 못할 것을 가장 사랑하며, 일생 동안 그것이 그리워 우는 존재이다. 만약 그 신비의 제단에 우연히, 혹은 누군가의 손길에 끌려 아주 잠깐 발을 들이게 되면, 우리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리하여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예를 들어서 이런 종류의 글에서, 되풀이하여 언급하고 싶어질 것이다.(144쪽, 제발트, 『자연을 따라. 기초시』, 문학동네, 2017. 옮긴이의 말 중에서) * 그렇게 배수아는 썼다. 나를 포함한,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수많은 '제발디언'들을..

흔해빠진독서 2021.08.08

백신의 계절, 코로나의 시절

습하고 더운 여름의 한가운데다.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맥이 빠진 것도 있고, 더운 날씨에 돌아다니는 것도 내키지 않고 해서 여름휴가를 아직 가지 못했다. 하긴, 휴가라는 게 뭐 별거 있나 마는, 그래도 휴가는 휴가니까. 어딜 꼭 가지 않더라도 그냥 쉴 수도 있는 거니까. 쉬긴 쉬어야 하는데, 언제 쉬어야 할지 달력을 한참이나 들여다본다. 그냥 주말을 끼고 하루나 이틀 쉴까, 네 명 이상 모이질 못하니 가족들끼리 어디 가기도 그렇고, 그럼 그냥 아무도 만나지 말고 혼자 집에서 뒹굴거릴까 생각해본다. 아무렴 어떤가. 되는대로, 마음 가는 대로 하면 될 일이다. 금요일에는 갑자기 코로나 백신 주사를 맞게 되었다. 저번 주에 직장에서 잔여백신을 맞을 사람 신청하라고 해서 신청했더니 바로 금요일에 백신을 맞으러 ..

어느푸른저녁 2021.08.08

랑종

* 예고편을 보고 어찌 이 영화를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예고편을 보고 어찌 이 영화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무당이 접신하듯, 어떤 필연적인 이끌림에 의해 이 영화를 보았다. 어쩌면 기대 이상의 공포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그동안 너무나도 공포스럽지 않은 공포영화만을 질리도록 보지 않았나. 영화가 삼 분의 이 이상이 흘러갔을 때, 나는 불현듯 알 수 없는 구토감을 느꼈다. 영화관에는 나를 포함하여 대여섯 명의 사람밖에 없었고, 에어컨 때문에 시원하기까지 했다. 갑작스러운 구토감이 치미는 것은 어쩌면 마스크를 계속 쓰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어 잠시 마스크를 벗었다가 다시 썼다. 그리고 영화를 계속 보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간헐..

봄날은간다 2021.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