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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시간

물의 시간들. 문득 그 말이 생각났다. 요즘 내 삶, 내가 느끼고 있는 이 시간들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그 단어가 떠오른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나는 왜 요즘 나를 통과해 흐르고 있는 이 시간에 대해서 그런 단어가 떠오른 것인가. 그건 결코 지금의 내 삶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무리 없으며 무난하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무언가, 어딘가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나는 아무런 간섭이나 방해 없이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내가 바라는 삶이다. 하지만 아무런 탈 없이 흘러가는 듯 보이는 시간 속에서도, 불쑥불쑥 떠오르는 불가해한 기억으로 인해 내 삶은 방해받고 만다. 알 수 없는 불편함과 불안이 그 순간 나를 잡고 한동안 놓아주지 않는다. 한 순간 꼼짝없이 ..

어느푸른저녁 2021.05.09

정경화 - 바흐: 샤콘느 Bach: Chaconne from Partita No 2 in d minor, BWV1004

* 차를 운전하는 동안에는 늘 USB에 담아놓은 음악을 듣는다. 거기에는 가요에서부터 시작해서, 팝송, 클래식, 재즈, 락, 댄스, 알앤비 등 국적이나 장르 여하를 불문하고 다양한 곡들이 담겨 있다. 차에서 듣는 음악은 그날그날의 날씨에 따라서 혹은 악셀을 밟는 세기에 따라서 명징하게 들릴 때도 있고 거의 들리지 않을 때도 있다. 특히 클래식이 나오는 경우에는 음량이 현저히 줄어든 듯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 볼륨을 높여서 듣는 경우가 많다. 물론 차에서 듣는 음악이란 그저 운전하기 무료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어떤 날씨와 시간, 그날의 기분 등에 따라서 익히 알고 있던 음악이라도 새롭게 들리는 경우가 있고, 내 귀의 주목을 받지 못하던 음악이 뚜벅뚜벅 내 가슴속으로 들어와 존..

오후4시의희망 2021.04.29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73쪽, 장 그르니에, 『섬』, 중에서) * 오랜만에, 그것도 우연히, 내가 몇 년 전에 살았던 지역의 사택 근처에 오게 되었다. 나는 이곳에서 한 삼 년 정도 살았는데, 사택이 1층이라서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신경쓰여 거의 창문의 커튼을 치고 살았다. 물론 베란다 창문에는 군데군데 불투명 시트지가 발라져 있긴 했지만, 커튼을 치는 것이 더욱 완벽하게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차단될 수 방법이었기에, 나는 답답함을 무릅쓰고 그렇게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지나다니는 사람도, 굳이 집안을 들여다볼..

어느푸른저녁 2021.04.23

올란도(Orlando)

틸다 스윈튼 주연의 영화 를 보았다.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지만, 도무지 어떻게 이 영화를 봐야 할지 알 수 없어 그냥 생각만 하고 있다가 우연히 올레티비에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보니 VOD로 올라와 있지 않겠는가. 그것도 무료로! 그래서 내 오랜 열망은 너무나 쉽게 실현되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우선 버지니아 울프의 원작 소설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원작이 있는 영화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책을 먼저 읽는게 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시각적으로 각인시켜주는 영화보다는 상상의 나래를 더 펼칠 수 있는 활자를 먼저 읽는 게 영화를 감상하는데도 더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책을 읽는 것은 영화를 보는 것보다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일이고, 우선 나는 틸다 스윈튼의 올란도를 보고 싶은 ..

봄날은간다 2021.04.21

장 그르니에, 《섬》, 민음사, 2020.

전통적인 종교들과 무관하게 성장한 한 젊은 사람에게는, 이 조심스럽고 암시적인 접근이 아마 보다 더 깊이 있는 반성으로 이끄는 유일한 방식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양과 밤과 바다······는 나의 신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향락의 신들이다. 그들은 가득히 채워 준 뒤에는 다 비워 내는 신들이다. 오직 그들과만 더불어 지냈더라면 나는 향락 그 자체에 정신이 팔려 그들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어느 날 그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나의 이 자연신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에게 신비와 성스러움, 인간의 유한성,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해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9쪽, 카뮈의 서문, '섬'에 부쳐서) *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그것들은 사사로운 내 인생에서 일어난 한 쌍의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와서 보면 약간 길을 돌아간 정도의 에피소드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내 인생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어느 날, 아마도 멀고 긴 통로를 지나,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온다. 그리고 내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흔든다. 숲의 나뭇잎을 휘감아 올리고, 억새밭을 한꺼번에 눕혀버리고, 집집의 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지나가는 가을 끄트머리의 밤바람처럼.('사육제', 181쪽) * 그렇게 기억과 관련된 여덟 가지 이야기들이 이 책에 실려있다. 여전히 하루키다운(?) 기묘한 설정들이 나오고, 우연과 우연을 둘러싼 비현실적이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위 글에서는 그것이 사..

흔해빠진독서 2021.04.17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열아홉 살 무렵의 나는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거의 알지 못했고, 당연히 타인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도 기쁨이나 슬픔이 뭔지는 대충 알고 있다고 내 딴에는 생각했었다. 다만 기쁨과 슬픔 사이에 있는 수많은 현상을, 그것들의 위치관계를 아직 잘 분간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종종 나를 몹시 불안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돌베개에', 9~10쪽) *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정신질환이랑 비슷해."('돌베개에', 15쪽) *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

사사롭지만 도움이 되는 일

어제 숙직을 하고 오늘 아침에 일터를 나왔다. 눈부신 봄날!이라는 표현이 딱 맞는 날이었다. 바람은 살짝 선선하지만 햇살은 온기를 품고 있는 전형적인 봄 날씨. 벚꽃은 이미 지고 그 자리에 연둣빛 잎사귀가 필 준비를 하고 있고, 벚나무가 아닌 나무들은 벌써 수줍은 연둣빛의 여린 잎사귀를 내밀고 있다. 차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바라본 봄날의 풍경이 무척 따사로워서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봄의 온기에 너무 취한 탓일까? 집에 냉장고가 텅 비어 있는 것이 생각나 뭐라도 좀 사야지 싶어서 마트로 향했다. 우선 제과점에 들러 빵을 몇 가지 사고, 마트에 들러 우유와 짜파게티 등을 샀다. 내가 간 마트에는 고객이 직접 계산대에서 계산을 하게 되어 있어서, 나는 내가 산 몇 개의 물건을 선반에 올려놓고 바코드를 찍..

어느푸른저녁 2021.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