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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G. 제발트, 《자연을 따라. 기초시》, 문학동네, 2017.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번 해보기, 이것이 자연의 유일한 목표다. 발아, 성장, 그리고 번식,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그리고 우리 머리에서 나온 쓰레기 더미에 불과한 기계를 통해서도.(37쪽) * 험악한 사건으로 점철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알프스산맥의 북쪽 기슭에서, 외면적으로는 파멸의 개념을 모르는 채로 자라났다. 그러나 자주 길에서 넘어져 다친 손에 붕대를 감고 푸크시아 관목 곁 창가에 앉아 몇 시간이고 꼼짝없이 창밖만을 쳐다보고 있을 때 너무 일찍 나를 엄습해온 눈앞에 고요히 떠오르던 소리 없는 재앙의 예감. 그때 창밖의 채마밭에는 빳빳하게 풀 먹인 흰 두건을 쓴 수녀들이 느릿느릿 채마밭 이랑 사이를 움직였는데, 막 깨어난 애벌레들과 겹쳐지며 뇌리에 새겨진 그 광경으로부터 나는 아직도 빠져..

알 수 없는 일들

*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어쩌면 모든 일들이,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작용으로 인해 이루어지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건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던가? 내가 그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면, 나는 그것에 대해 전혀 몰랐을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 알 수 없다고 느끼는 것들이 실은 내가 알게 모르게 했던 행위들이 서로 뒤섞여,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시공간을 날아와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은 아닐까. 유튜브의 알 수 없는 알고리즘처럼. 오래전, 내 마음을 흔들었던 음악이 어느 순간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다. 나는 그것을 2014년에 블로그에 기록해 놓았고, 2021년인 지금 다시 한번 더 그 음악을 내 블로그에 올린다. 모든 것은 우연이지만, 그 모든 것이 어쩐지 우연이 아닌 것만..

오후4시의희망 2021.07.25

연못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저기요, 아저씨. 센트럴 파크 남쪽에 오리가 있는 연못 아시죠? 왜 조그만 연못 있잖아요. 그 연못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좀 엉뚱하기는 하지만 아시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 사람이 알고 있을 가능성은 백만 분의 일의 확률이었다. 기사는 고개를 돌리더니 날 미친 사람 보듯 쳐다보았다. "지금 뭐 하는 거요? 날 놀리는 건가?"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좀 그런 일에 흥미가 있어서요."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입을 다물었다.(85쪽, J. 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2001.) * 몇 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아무런 말도 쓸 수 없었다. 재밌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무런 말도 쓸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 보통 나는 ..

흔해빠진독서 2021.07.17

J. 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2001.

시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합은 무슨. 만약 잘난 놈들 측에 끼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시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측에 끼게 된다면, 잘난 놈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편에 서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시합이 되겠는가? 아니, 그런 시합은 있을 수 없다.(19쪽) * 훌륭하다니. 난 정말로 그런 말이 듣기 싫었다. 그건 위선적인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20쪽) * "저기요, 아저씨. 센트럴 파크 남쪽에 오리가 있는 연못 아시죠? 왜 조그만 연못 있잖아요. 그 연못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좀 엉뚱하기는 하지만 아시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 사람이 알고 있을 가능성은 백만 분의 일의 확율..

모든 상실이 사랑을 입증한다

책이 잘 읽히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나는 책을 잘 읽을 수 없었지만, 요즘들어 더 그렇다. 의식이 명료하지 않고 머릿속이 불투명한 안개가 낀 듯 흐릿해서 활자에 집중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화상으로 독서모임에 참여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을 함께 읽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는데, 다들 본인들의 취향에 맞지 않는 책이었다고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어떤 이는 다섯 번씩 읽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은 상당히 진지하고 열성적이며 마음씨가 여린 사람처럼 보였는데, 어떻게 한 책을 다섯 번이나 읽을 수 있는지 신기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기 때문에,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다섯 번이나 읽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박수를 치며 경의를 표했..

어느푸른저녁 2021.07.10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계절을

호우주의보와 폭염주의보가 발효중이고 일부 지역에서는 폭염특보까지 발효중이라고 한다. 조금 전부터 내가 사는 이곳에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후덥한 날씨와 따가운 태양볕에 이제 정말 여름이 온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와는 반대로 나는 미처 여름인지, 봄의 연장인지 그저그런 날들의 연속인지 알지 못한채 흘러온 기분이 든다. 인터넷이나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연일 장마니 폭염이니 이야기를 해도 별 실감을 하지 못했다. 그저 비가 오면 비가 오는가 보다, 햇볕에 피부가 따가우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긴 것이다. 특별히 여름이구나! 하는 걸 느끼지 못했다고 해야할까. 현실과 꿈 속의 경계에 있는 것처럼 흐릿하고 몽롱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계절에 대한 자각이 둔해지고, 모든 감각들이 녹이 슨 것처..

어느푸른저녁 2021.07.10

이미 너무 늦은

이 기분은 무얼까.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리그를 만들며 잘 살아가고 있는데, 나만 홀로 살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 이건 나 자신의 문제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스스로 자초한 일인지도 모르지만, 때로 그것이 견딜 수 없을만큼 내 숨통을 조여온다. 나는 이미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나 스스로 고립되기를 바라고, 인간관계의 얽히고 섥힘에서 벗어나길 바라며, 아무것도 그 누구도 나를 간섭하지 않기를 바랐건만, 그런 내 성정이 거꾸로 내 목을 조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는 때로 견디기 힘들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내가 어떤 상태이기를 원하는가. 이 모든 생각들이 이제는 너무 늦은 것은 아닌지. 눈물은 나지 않지만 정말 울고 싶어진다. 나 자신의 우유부단함과 모순이 너무나도 징그..

어느푸른저녁 2021.07.04

존재는 눈물을 흘린다

유월의 마지막 날이다. 사무실에서는 오늘 하루 종일, 인사발령으로 떠나가는 사람들의 작별 인사가 주를 이뤘다. 떠나는 사람이 인사를 하고 가면, 좀 있다가 떠나는 또 다른 사람이 인사를 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들 떠나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고 잘 가라는 인사를 전했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어수선했지만, 유난히도 조용한 날이었다. 나는 남는 사람에 속해 있어서 마음의 동요는 덜했지만, 잘 대해주던 직장 상사의 떠나는 뒷모습을 보니 잠시지만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지금껏 수없이 떠나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했어도 울컥하지는 않았는데, 오늘,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에 나 자신도 의아했다. 아마도 그 사람을 향해서라기보다는 나 자신의 내면에서 불현듯 여러 가지 감정들이 한꺼번에 떠올랐기 때문이리..

어느푸른저녁 2021.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