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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밍 풀

이 영화의 주인공은 베스트셀러 추리소설 작가이다. 그녀는 출판사 사장의 권유로 차기작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해 프랑스에 있는 사장의 별장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출판사 사장의 딸이라고 하는 젊은 여인(줄리)를 만나게 되고, 혼자, 조용히 영감을 얻으며 집필에 몰두하기 위해 갔던 별장에서의 생활이 그녀의 돌연한 출연으로 인해 방해를 받기 시작한다. 엄격하고 조용함을 원하는 영국인 사라와 자유분방하고 눈치보지 않는 프랑스인 줄리의 기묘하고도 아슬아슬한 동거는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 영화가 미스테리 스릴러라는 건 알았지만, 영화 초반에는 그런 느낌을 전혀 갖지 못했다. 영화는 중반까지 주인공 사라와 편집장의 딸인 줄리의 티격태격하는 신경전을 보여주고 있는데, 영화..

봄날은간다 2021.06.20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필로소픽, 2014.

내가 토마스 베른하르트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배수아 때문이었다. 배수아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이기도 하고 독일어 문학작품을 번역하는 열렬한 번역가이기도 하다. 나는 그가 발표한 소설뿐만 아니라 그가 번역하는 작품도 꼬박꼬박 찾아서 읽곤 하는데, 그중에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라는 소설이 있었다. 나는 그 소설로 인해 토마스 베른하르트를 알게 되었고, 배수아의 작품들만큼이나 매료되었다. 소설 전체가 하나의 문장처럼 긴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는 형식과 지독하다 싶을 만큼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읽은 그 어떤 책과도 달랐다. 그것이 이 작가의 독특하면서도 일관된 스타일이라는 것을 이후에 를 읽고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이번 독서모임에서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

흔해빠진독서 2021.06.12

풍경처럼,

* 제가 당신을 풍경처럼 찍어드릴까요? 사람이 주인공이 아니라 사람도 풍경 속 하나의 사물처럼, 주위 풍경과 자연스레 하나가 되도록 말입니다. 굳이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건 되려 어색함을 자아낼 뿐이죠. 우리는 모두 전문적인 모델이 아니잖아요? 어색한 표정으로 하나같이 똑같은 손가락 V자 혹은 손가락 하트를 만들어 보일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암묵적이고도 사회적인 동의를 한 것처럼 사진을 찍을 때 다들 비슷한 포즈를 취하곤 하죠. 아, 물론 요즘 젊은 사람들은 마치 모델처럼, 자신의 매력을 뽐내는 최적의 포즈를 잘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드는 것밖에는 할 줄 모르는 저와는 달리 그들은 무척이나 전문적이고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아마도 사진을 찍어 SN..

어느푸른저녁 2021.06.10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필로소픽, 2014.

나는 내 생애에 단 한 번도 책 한 권을 완전히 다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나의 독서 방식은 고도의 기술로 책장을 넘기는 사람, 즉 읽기보다 책장 넘기기를 더 좋아하는, 그래서 한 쪽을 읽기 전에 아마도 수백 쪽을 뒤적거리는 그런 방법이지요. 그러나 한 쪽을 읽으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아주 철저하게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열정으로 읽습니다. 내가 독자이기보다는 오히려 책장을 넘기는 사람임을 당신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책장 넘기는 것을 읽는 것만큼 좋아합니다. 나는 다 읽지는 않았지만 수백만 번도 더 책장을 넘겼습니다. 그렇지만 책장을 넘길 때에도 항상 읽을 때와 같은 기쁨과 실제적인 정신적 쾌감을 느꼈지요. 책 한 권을 전부 다 읽지만 단 한 쪽도 철저하게 읽지 않는 독자보다는..

블레이드 러너 2049

* 2017년에 개봉했으니 햇수로 4년 만에 이 영화를 보았다. 1편에 해당되는 가 1993년에 개봉했으나 나는 당연하게도(?) 보지 못했다. 를 보지 못했으니, 속편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궁금할 리가 없는데도 나는 이상하게 이 영화가 궁금했다. 보고 싶었다. 속편의 감독인 드니 빌뇌브라고 하는 생소한 이름을 가진 감독의 전작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어쩌면 뉴스 기사나 텔레비전에서 언급되는 SF의 고전이라 일컫는 를 기억 속에 저장해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속편인 의 감독인 드니 빌뇌브의 이름을, 최근에 그가 감독했지만 아직 개봉하지 않은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고. 또한 라는 이름으로 1984년에 영화화된 적이 있는 프랭크 허버트의 SF 소설 을 리메이크한 것이다. 이렇듯, 전작을 보지 못했거나, ..

봄날은간다 2021.05.30

아버지와 함께

부처님 오신 날, 아버지와 함께 절에 갔다. 나에게 부처님 오신 날은 그저 쉬는 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는데, 매 년 이 맘 때가 되면 아버지가 절에 가고 싶다는 말을 우회적으로 내비쳐도 그저 하시는 말이겠거니 하면서 지나쳤는데, 이번에는 어쩐지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굳이 내가 같이 가지 않더라도 아버지는 다른 누군가와 함께 절에 곧잘 다녀오시곤 했으니까. 그렇다고 아버지가 절에 주기적으로 다녔다거나, 한 번이라도 시주를 했다거나, 연등을 샀다거나, 초를 사서 올리거나 그 흔한 기와에 가족들 건강을 기원하는 말 같은 것을 적은 것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절에 가자는 건 그냥 심심하니까 혹은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하니까 한 번 가보자는 것이 아니겠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굳이 무슨..

어느푸른저녁 2021.05.22

신경숙, 《아버지에게 갔었어》, 창비, 2021.

아버지, 나는 부서지고 깨졌어요. 당신 말처럼 나는 별것이나 쓰는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그 별것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해요.(93쪽) * 책을 통해 인간을 알게 되었지. 얼마나 나약하고 또 얼마나 강한지를 말이야. 한없이 선하고 끝간 데 없이 폭력적이지.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고 불행과 대치하며 한생을 살다 간 사람들은 자취를 남기네. 모진 상황들을 견뎌낸, 흔적 말이야. 내가 책을 읽는 일은 그 흔적 찾기였는지도 모르겠어.(322쪽) *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더 깊이 그 생각에 빠져든다. 잊으려고 애쓰면 더욱 잊히지 않듯이. 생각을 하지 말자, 해서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더 생각할 게 없을 때까지 생각을 하는 수밖에 길이 없..

디담, 브장, 『나, 여기 있어요』, 교양인, 2020.

저는 평소 공감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귀담아듣고, 진심으로 공감을 표시하는 일에 나름 자신 있다고 여겼습니다. 혹여 내가 무심코 한 말에 상대방이 상처 받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적도 많았으니까요. 그래서 간혹 동료들과의 회식자리에서 술기운 때문에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하고 집에 돌아온 날에는 후회와 자책으로 머리를 쥐어뜯을 때도 있었습니다. 다음 날 동료에게 물어보면, 단지 말이 좀 많았을 뿐, 특별히 누군가에게 모진 말을 했다거나, 언성을 높인 건 아니지 않느냐는 대답을 듣고는 안심을 하곤 했지요. 물론 술을 많이 먹어서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필름이 끊긴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요(애초에 술을 많이 마시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굳이 하지 말아야 ..

흔해빠진독서 2021.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