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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사랑은 그다지도 짧고, 망각은 그렇게도 길다. (44쪽,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중에서) 파블로 네루다의 젊은 날의 시집 를 읽었기 때문일까. 갑자기 시가 읽고 싶은 마음에 인터넷 서점에서 시집을 구입했다. 읽었던 시집을 다시 읽는 것도 좋겠지만, 어쩐지 소설보다 시를 등한시한 것 같은 마음에 시집을 더 구입하고 싶었다. 읽고 싶은 시집은 많았지만, 이상하게도 최승자의 시집을 더 구입하고 싶어서 이미 가지고 있는 을 제외한 이후 세 권의 시집을 구입했다. 비교적 최근(이라고 해도 무려 2010년에 나왔다니!)에 나온 은 분명히 내가 읽고 책장에 꽂아 놓았는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최승자의 시집과 칼릴 지브란의 ,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집 세 권, 류인서의 까지. 최근에 본 영화 의 OS..

흔해빠진독서 2021.10.17

페소아

페르난두 페소아. 한 번이라도 그의 글을 읽었던 사람은 그 이름을 잊지 못한다. - 배수아 역, 『불안의 서』, '옮긴이의 글'에서 * 몇 년 전 페소아의 를 읽고부터 그는 늘 내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결코 설명하지 못하는, 부조리한 생의 비밀을 마주할 때면 늘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페소아였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페소아 연구자라 일컫는 김한민이라는 작가가 쓴 를 읽게 되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은 무엇인가? 이 책은 페소아의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나는 페소아라는 말이 포르투갈어로 사람을 뜻한다는 것, 그 어원이 가면을 의미하는 페르소나라는 것, 또한 페소아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면 페르손느가 되고 이는 '아무도 없음'을 뜻하기도 한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처음..

불안의서(書) 2021.10.15

파블로 네루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민음사, 2007.

나는 바란다 봄이 벚나무와 하는 것과 같은 걸 너와 함께 하기를. (33쪽, 「매일 너는 논다」중에서) * 내가 네 침묵으로 말하게 해다오 (34쪽, 「나는 네가 조용한 게 좋다」중에서) * 너는 내 음악의 그물 속에 들여졌다, 내 사랑이여, 그리고 내 음악의 그물은 하늘처럼 넓다. 내 영혼은 네 슬퍼하는 눈의 기슭에서 태어났다. 네 슬퍼하는 눈에서 꿈의 땅은 시작한다. (36쪽, 「해 질 녘 내 하늘에서」중에서) * 저녁이 계류해 있는 부두는 슬프다. 내 삶은 피곤하고 목적도 없이 굶주린다. 나는 내가 갖지 않은 걸 사랑한다. 너는 너무 멀리 있다. 내 혐오는 지루한 황혼 녘과 씨름한다. 그러나 밤은 오고 나에게 노래 부르기 시작한다. (40쪽, 「여기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중에서) * 사랑은 그다지도..

봄이 벚나무와 하는 것

나는 바란다. 봄이 벚나무와 하는 것과 같은 걸 너와 함께 하기를. - 파블로 네루다, '매일 너는 논다' 중에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수록. * 어디서 저 문장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겐 기억나지 않는 것 투성이다. 하지만 저 문장을 읽었다는 기억만은 확실히 남아있다. 늘 이런 식이다. 그것을 떠올릴만한 상황에 대한 기억은 전혀 나지 않고, 오로지 그것을 읽었다는 느낌만이 남아있다. 이것을 느낌의 기억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느낌 또한 전혀 인지하지 못하다가, 우연히 그 문장을 읽었을 때 간신히 떠올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그렇지 않다면 나는 그 어떤 문장도 다시 떠올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봄에 대한 글을 어디선가..

어느푸른저녁 2021.10.05

김한민, 《페소아》, 아르테, 2018.

우리에게는 '영향을 선택할 권리', 좋은 영향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 선택의 폭은 늘 우리가 원하는 만큼 넓지 않고, 그 선택권은 전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타협을 거쳐야 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우리는 태어난 곳에 고정되어 살아가는 식물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동물이기에, 우리가 받는 영향들을 선택하는데 참여할 수 있고, 이미 참여하고 있다. 환경 결정론자들도 인간이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환경을 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나는 내가 영향받을 사람과 환경을 최대한 능동적으로 택하고 싶었고, 고민과 타협 끝에 포르투갈과 페소아를 선택했다. 다행히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결정하는 것은 영향의 초기인자들일 뿐, 그 결정의 의미와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페소아의 마지..

Schubert Piano Trio No. 2 In E Flat Major

* 우연히 이 음악을 듣고, 영상 속 영화가 다시 생각났다. 언제, 어떻게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이 영화가 가진 느낌, 주인공의 소통 불가능성과 그로 인한 고통, 불가해한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 아직도 선명하게 내 가슴속에 남아 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영상을 따라 흐르는 음악을 듣자마자 생생하게 떠오르다니. 그렇다면 그것은 잊은 것이 아니라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리라.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와 음악을. * 이 글을 쓰고 혹시나 싶어 내 블로그에 피아니스트를 치고 검색해보니, 2006년도에 나는 이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올려놓았다. 다시 읽어보니 몇몇 표현은 지금의 나라면 쓰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밖에 쓸 수 없었겠지. 하지만 그때 내가 말하려고 ..

오후4시의희망 2021.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