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121

3000년의 기다림

지니가 당신에게 세 가지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한다면 당신은 무슨 소원을 빌 것인가? 여기 삼천 년 만에 깨어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 지니가 앞에 있다. 어쩌다 지니라는 거대한 복권에 당첨된 중년의 시니컬한 여교수(틸다 스윈튼)는 소원을 빌 생각은 하지 않고 당장 그가 물러가기를 바란다.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어야만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지니는 그녀에게 어떻게든 소원을 빌도록 애원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겪었던 이야기를 마치 천일야화처럼 들려준다. 헌데 그 이야기라는 것이 다름 아닌 지니의 사랑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마음을 열지 않던 교수는 점차 그에게 동화되고, 결국 그에게 자신을 ― 오래전 그가 열렬한 사랑을 바쳤던 여성들에게 그랬듯 그렇게 ― 사랑해 달라는 소원을 빈다. 이 영화는 사랑에..

봄날은간다 2023.08.04

애프터썬

이것은 사람의 뒷모습에 관한 영화가 아닌가? 함박웃음을 지은채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고,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찍은 행복한 사진 같은 것이 아니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순간에 찍힌 어떤 이의 뒷모습과도 같은 그런 영화. 뒷모습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런 표정을, 회상의 형식으로 들춰보는 영화였다. 캠코더에 찍힌 아버지의 영상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얼핏 30대 초반의 아버지(캘럼)와 11살 딸(소피)의 잔잔한 여행기로 보인다. 겉으로 봤을 때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부녀의 여행에 특별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이야기가 어느덧 성인이 된 딸의 회상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러니까 성인이 된 딸이 아련하고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아버지와의 여행에서 찍었던 ..

봄날은간다 2023.05.29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삶에는 큰 고통이 따르지. 영원한 삶에는 영원한 고통이 따르게 돼 있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요. 매번 조금씩 지치긴 하는데 이번엔 돌아가자마자 아빠 보러 집에 갈 거예요." "그런데, 피노키오, 아버지를 다시 못 보면 어쩌지?" "다시 만날 거예요. 못 만날 리가 없잖아요." "넌 영원히 살겠지만, 네 친구들과 사랑하는 이들은 그렇지 않거든. 그들과 함께하는 매 순간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어.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는 마지막이 되어 봐야 알지." *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를 보았다. 이렇게 슬플 줄 알았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지 않았다면 더욱 후회했을(좀 이상한 말 같지만 어쨌든), 그런 영화. 피노키오는 그 누구도 아닌 피노키오. 피노키오로 인해 우리는 또 한 번 우리네 삶의 공공..

봄날은간다 2023.05.09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

무엇이든지 마지막이라는 것은 많든 적든 어떤 슬픔을 내재하고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도 그랬고 반지의 제왕 시리즈도 그랬다. 물론 마블 영화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하며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 안에서 각 캐릭터들의 마지막 이야기라는 것은 존재하므로, 그 시리즈의 영화들을 보면 볼수록 역시 조금은 슬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가 그저 단 한 편일 경우에는 크게 인식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의 세계관 속 각각의 이야기들이 시리즈로 만들어질수록 우리는 오랜 시간 영화 속 캐릭터들과 함께 커가면서 그것을 지켜보게 된다. 물론 모든 시리즈의 영화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영화는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이므로, 내가 그것에 애착을 가지는 만큼 영화가 특별해지는 것은 ..

봄날은간다 2023.05.05

길복순

오로지 전도연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했다. 아, 이렇게 말하면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녀가 나온 영화를 모두 찾아서 볼만큼 그녀의 열렬한 팬은 아니니까. 그럼 이렇게 말해야 할까? 전도연이 중학생의 엄마이자 전문 킬러역으로 나오는 영화인데 어찌 안 볼 수 있단 말인가? 포스터마저 멋진데! 화려한 액션을 기대했다면 조금은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아, 물론 액션이 많고 화려하긴 하다. 하지만 그 화려함은 합이 잘 짜인 쿵푸를 볼 때의 그것이 아니라 난장 액션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불협화음을 듣는 것 같은, 현실적인 액션을 볼 때의 즉흥적인 재미가 있다. 하긴 청부살인업자의 싸움 기술이 과시적일 필요는 없으니까. 극 중 길복순은 말한다. "양손 쓰는 건 좋은데 액션에 토를 너무 많이 달았네." 그래, 액..

봄날은간다 2023.04.01

너의 세상이 온통 나였으면 좋겠어(더 글로리 파트2)

시즌 2라기보다는, 총 16부작인 드라마를 8편씩 나눠서 보여주는 것이고, 이번에는 전편에 이어서 9편부터 16편까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파트 2라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결말을 향해가는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동은은 가해자들에게 복수를 할 것인가? 복수의 풍경은 과연 어떤 모습일 것인가? 그리고 복수 이후의 풍경은 또 어떨 것인가. 격렬한 무언가가 터져 나오기를, 클라이맥스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하고 파트 2를 본다면 분명 얼마간은 실망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랬으니까. 나는 보는 내내 어서 통쾌한 피바람이 불기를 바랐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고 난 후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톤이 있음을. 그것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봄날은간다 2023.03.19

놉(NOPE)

조던 필 감독의 을 보았다. 전작인 과 를 인상 깊게 봤던지라 이번 영화도 기대가 되었다. 에서의 충격적이고 명징한 스토리에 비해 에서의 당혹스러움이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어떤 영화일지 궁금했다. 공포와 미스터리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이 영화는 그러니까 영화와 영화를 둘러싼 것들에 대한 영화였다. 처음에는 에서처럼 인간들의 교만과 어리석음(침팬지나 말을 길들여 볼거리를 선사하는 인간들)에 대한 우화인가 싶었는데 그보다는 영화에 대한 영화라는 게 더 맞는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은 영화라는 예술을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인간에 대한 경의를 드러낸다기보다는(물론 영화를 위해 보이지 않게 노력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 남매의 조상들 이야기를 들어보..

봄날은간다 2023.03.04

그건 너무 페어플레이 같은데요, 여러분?

주말 내내 《더 글로리》를 정주행 했다. 학교폭력의 묘사가 너무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과시적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실제 현실은 그보다 더하다는 기사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은 그보다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즌2에서 본격적인 복수가 시작될 모양이다. 시즌1은 복수를 위한 사전준비 정도로 보인다. 어떤 식의 복수가 될지 지켜봐야겠지만 한가지 확실한 사실은 가해자는 역시 자신이 가해자인 줄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면 알고도 그걸 즐기는 것이거나. 극 중 동은(송혜교)의 독백 중 이런 것이 있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파상은 파상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 글쎄... 그건 너무 페어플레이 같은데요, 여러분.' 당한 만큼 갚아주지 않고, 당한 것보다 더 갚아주겠다는 의지..

봄날은간다 2023.0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