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117

헤어질 결심

'마침내' 을 보았다. 처음엔 이포의 안개처럼 몽환적인 영화인가 싶었는데, 마지막 장면까지 보고나니 너무나 '꼿꼿한' 영화였다. 희미한 안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꼿꼿한 서래(탕웨이)의 마지막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해준(박해일)이 서래를 좋아한 이유처럼 나는 이 영화가 좋아졌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이 영화가 사람의 '심장'이 아니라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이란, 버지이나 울프의 말처럼,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전적으로 의존하는, 참으로 신비로운 기관'이 아닌가. 안갯속처럼 잔상을 쉬 알 수 없는 영화였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때로 어떤 헤어질 결심은 깊이 사랑했다는 사실의 반증이..

봄날은간다 2022.07.10

범죄도시2

며칠 전 아버지가 갑자기 내게 물었다. "요즘 범죄도시2가 그렇게 재밌다면서? 관객이 천만 명 넘었다고 하던데." "천만이 넘었다고요? 요즘 다들 그 영화 이야기를 많이 하긴 하던데... 천만이 넘을 줄은 몰랐네요."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오늘 를 보았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 테지만, 어쨌거나 영화는 내 개인적인 취향과는 별개로 일단 재미가 있었다. 하긴 재미가 없었다면 천 만이라는 관객이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도 오랜만에 재미있는 영화를 봤다며 좋아하셨다. 영화를 보고 나니 왜 이 영화가 천만이나 넘는 관객을 동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재미라는 건 참으로 주관적인 느낌이므로, 당연한 말이지만, 저마다 그것을 느끼는 부분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영화를 보기 전에 ..

봄날은간다 2022.06.19

윤희에게

너는 네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나도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 언젠가 내 딸한테 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용기를 내고 싶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야. 추신 - 나도 네 꿈을 꿔. - 영화 중에서 * 마치 잘 짜인 단편소설을 한 편 읽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오래전에 본 영화 도 생각났다.(영화 속 배경 도시가 오타루인 데다가 '편지'가 중요한 매개로 등장한다) 감독도 아마 그 영화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이 영화를 보고 눈과 편지,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꿈을 꾸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에 대해서. 가족은 서로에게 족쇄와 억압으로 작용하기도 하지..

봄날은간다 2022.03.26

더 배트맨

실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를 보고 싶었으나, 내가 사는 곳 그 어디에도 상영하는 데가 없었다. 이럴 수가 있나! 나는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정신을 차린 뒤, 차가운 현실을 직시하며 요즘 무슨 영화가 대세인가 보았다. 이 상영관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배트맨 캐릭터도 좋아해서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겠다 싶었다. 로버트 패틴슨의 배트맨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평일 오후의 상영관에는 나 이외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상영관 전체를 전세 낸 것 같은 기분으로 내가 예매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이전 영화들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 아닌가 생각했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느낌이 어땠냐고? 나는 거의 세 시간이나 되는 영화의 긴 러닝..

봄날은간다 2022.03.07

레베카

* 넷플릭스에서 를 보았다. 뮤지컬로 알고 있던 작품을, 뮤지컬을 보기 전에 영화로 접했다. 소설이 원작이라고 하는데 물론 소설도 읽지 못했다. 유튜브를 통해서 많이 들었던 뮤지컬 넘버들이 아닌, 순수한 영화의 레베카는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다. 물론 뮤지컬과 영화는 다르므로 단순 비교하기는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가장 궁금한 건 레베카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였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인 '레베카'는 이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단지 끊임없이 호명되며, 다른 인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써 기능한다. 그녀와 얽힌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것이 이 영화의 묘미인 것이다. 그 묘미를 제대로 살렸는가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이다. 미스터리 스릴러이긴 하지만 강렬한 서스펜스가 느..

봄날은간다 2022.02.11

파워 오브 도그

(스포일러 주의) *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 를 보았다. 이 영화는 뭐랄까, 여러모로 내 예상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외피는 서부극처럼 보이는데, 처럼 퀴어 로맨스 영화인가 싶다가도, 그보다는 인물들의 심리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인가 싶을 때쯤 차가운 복수극으로 끝난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제목의 의미가 무엇일까 계속 생각했다. '개'로 대변되는 세력은 도대체 누구인가? 혹은 무엇인가? 그 의문은 영화의 마지막에 피터가 읽는 성경의 한 구절을 통해서 비로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 '비로소' 나는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존재감과 그가 맡은 '필'이라는 인물의 위악적인 내면 때문에 그에게 자꾸만..

봄날은간다 2022.01.15

돈 룩 업

* 이토록 신랄한 풍자라니.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인간에 대한 애정은 자취를 감추고 '죽어도 싸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인간은 이렇듯 어리석고, 배우지를 못하며, 구제불능인 존재라는 걸 일깨워주는 영화랄까. 굳이 혜성의 충돌이라는 상황이 아니라도 충분히 우리는 지금 위기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듀나는 이를 기후위기의 은유라고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우리는 혜성의 충돌이라는 외부적인 위기 상황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자기 파괴적인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지구상 최고의 생물체라 스스로 일컫는, 모든 생명체 중 가장 뛰어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 인간 종족은 그 뛰어난 우수성으로 인해 스스로 파멸의 구렁텅이로 걸어 들어가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깨어있는..

봄날은간다 2022.01.08

고요의 바다

* 일단 제목이 끌렸다. 배우들도 괜찮아 보였다. 예고편을 보니 내가 많이 보지 않는 장르의 드라마였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SF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넷플릭스에서 만들었으니 제작비가 부족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특수효과랄지, 비주얼적인 면에 대해서도 믿음이 있었다. 누군가는 제목처럼 너무 '고요'한 거 아니냐고 했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빠른 전개를 바라는 사람들은 다소 느릿하다 느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가 달이고 그곳에 세워진 연구기지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배경 자체에서 오는 고립되고 정적인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고요하지만 고독하고, 어떤 기대감과 불길함을 동시에 품고..

봄날은간다 2022.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