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125

씨너스: 죄인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의 《씨너스: 죄인들》을 조조로 보았다. 토요일 아침부터 공포와 스릴러 장르의 어둡고 무거운(그럴 것이라 예상되는) 영화를 보는 것이 마뜩잖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사는 곳의 영화관에서는 이 영화를 오전에 단 한 번만 상영했기 때문이다. 하루에 한 번, 그것도 아침 9시 45분에 시작하는 공포 영화라니. 시간을 선택할 수 없다는 불평보다는, 그 시간에라도 상영을 해준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겠지만. 어쨌든 갑자기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이 영화를 《블랙팬서》의 감독이 만든 작품 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무슨 내용인지, 어떤 장르인지 전혀 몰랐고 크게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영화 평론가들의 리뷰를 보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예고편..

봄날은간다 2025.05.31

계시록

"서로 연결성, 연관성이 없는 정보들 사이에서 일정한 규칙이나 패턴, 의미를 찾는 거죠. 그냥 자연현상인데 특징적인 무언가 보인다고 믿는 거죠. 이런 사람들은 배가 떨어지면 기어이 까마귀를 만들어냅니다."(연상호 감독, 《계시록》 중에서) *계시라는 말은 매력적이다. 그 말은 지리멸렬한 내게도 무언가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나도 가끔 계시라는 말을 쓴다. 쉽게 일어날 것 같지 않는 일이 우연하게도 연이어 발생했을 때, 혹은 스치듯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내 앞에 현실로 나타났을 때, 이것은 계시가 아닐까?라는 말을 쓰게 되는 것이다. 계시라는 말에는 위계가 있고, 설명할 순 없지만 어떤 영적인 존재의 특별한 힘이 느껴지는 것 같고, 그리하여 기대감이나 영감 등으로 한순간..

봄날은간다 2025.05.24

장송의 프리렌

애니메이션인 《장송의 프리렌》은 결국 기억에 관한 이야기였다. 천 년을 넘게 사는 엘프에게, 백 년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들과의 기억이란 별 거 아닐 수도 있지만, 마왕을 쓰러뜨리기 위해 다니던, 동료들과의 10년 동안의 기억이, 그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삶의 어떤 국면마다 지속적으로 떠올리는 추억이 된다. 처음에는 너무 느릿느릿 진행되는 이야기가 지루하다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상하지, 나는 왜 이 만화를 보면서 그렇게 슬퍼했던가? 오래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A.I.》를 보고 주책없이 눈물을 펑펑 흘렸던 것처럼. 나는 마치 만화 속 주인공인 프리렌처럼, 아주 천천히, 시간이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느릿느릿하게 이 만화를 보았다. ..

봄날은간다 2025.04.26

버닝

"종수씨는 무슨 소설을 쓰세요? 이런 거 물어도 되나?" "저는 아직까지 무슨 소설을 써야 될지 모르겠어요." "왜요?" "저한텐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요." - 이창동 감독, 《버닝》중에서 *종수(유아인)는 소설가 지망생이다. 그는 알바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다가 우연히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았던 해미(전종서)를 만난다. 종수는 해미로부터 자신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동안 집에 있는 고양이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는 벤(스티븐 연)이라는 수수께끼의 남자를 종수에게 소개해 주며 몇 차례 술자리를 함께 한다. 벤의 번드르르한 집과 종수의 낡은 집에서. 술자리에서 종수는 벤의 은밀한 취미를 듣게 된다. 그는 두 달에 한 번 버려진 비닐하우스를 골라 태워버린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

봄날은간다 2025.04.08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양자경 주연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개봉할 때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다. 내가 사는 곳의 영화관에서는 개봉을 하지 않았거나 해도 아주 극소수의 개봉관에서만 했을 것이다(대부분 내가 보고 싶어 한 영화들은 그랬다). 물론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거나 발품을 팔았다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게으르고 게을러서, 보고 싶은데 개봉하는 곳이 별로 없구나 하면서 무심히 넘겼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엔 극장 개봉을 놓치더라도 볼 수 있는 루트가 아주 많으므로, 단지 시기의 문제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시기의 문제에 나는 늘 관대하다.  그리하여 이번에 넷플릭스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이 영화는 2022년에 개봉했다. 지금으로 치면 3년이나 전에 개봉했음..

봄날은간다 2025.03.16

미키 17

《미키 17》을 봤다. 평소 텅 빈 영화관에 오늘은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지금까지 영화관이 유지되고 있는 게 기적일 정도의 동네에 살고 있다) 그만큼 봉준호 감독의 영향력이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화는 재미있었다. 이전 영화였던 《기생충》과 같은 둔중하고 혼란스러운 충격파는 없었지만, 《옥자》나 《설국열차》가 떠오르면서, 그와는 미묘하게 다른, 이 영화만의 개성과 재미가 있었다. 영화를 보기 전과 후에, 소위 영화평론가들의 별점과 한 줄 평을 읽는다. 당연하게도 영화를 보기 전에 보는 평은, 그 영화에 대한 기대랄까, 대략적인 느낌을 알 수 있다면,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읽는 평은 내 생각과 그들의 말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씨네 21에 올라온 전문가 평 중에 '어느덧 ..

봄날은간다 2025.03.01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영화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였다. 영화의 매 장면이 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초상화요, 풍경화요, 정물화처럼 느껴졌다. 몇 명 되지 않는 등장인물과 군더더기 없이 말쑥한 영화 속 배경과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주인공의 직업인 화가라는 설정과 어우러져 영화 전체가 하나의 움직이는 그림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원래부터 움직이는 그림을 영화라고 부르지 않는가? 물론 활동사진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말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이 그린 이 그림은 그저 그림은 당연히 아니다. 이상한 말 같지만 나는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이 그림은 영화 속에서 마리안느가 그린 엘로이즈의 초상화처럼, 서서히 곁에 다..

봄날은간다 2025.01.23

하얼빈

'불을 들고 어둠 속으로 걸어갈 것이다' 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은 안중근의 저 대사로 끝난다. 하지만 끝이 아니라 시작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지금 대한민국 역시 혼란한 시국이어서 그럴 것이다. 나는 감독이 저 대사를 위해서 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영화는 특히나 아쉬움과 열광의 가운데 있는 느낌이다. 누군가는 《명량》이나 또 다른 안중근 영화인 《영웅》, 《남한산성》을 언급하면서 이 영화의 포지션을 가늠하기도 한다. 나 역시 영화를 보고 난 후 그 영화들이 떠올랐다. 분출되는 감정의 양으로 보자면 제일 위에  《명량》이, 중간에 《남한산성》 이, 제일 아래에 《하얼빈》이 놓여 있지 않을까. 그만큼 이 영화는 관객의 감정을 크게 동요시키지 ..

봄날은간다 2024.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