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간다 117

도그맨

오랜만의 극장이다. 그동안 극장이라는 장소를 잊어버린 사람처럼, 새삼스러웠다. 갑자기 왜 영화가 보고 싶어 졌는지 모르겠다. 단순히 보고 싶은 영화가 없었기 때문일까? 우연히 인터넷을 보다가 뤽 베송 감독의 이라는 영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게 오늘 개봉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영화를 예매했고, 오랜만에 간 극장의 정중앙에서(마치 영화관을 전세 낸 듯이)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는 폭력과 학대로 얼룩진 한 남자의 삶을 들여다본다. 그가 어쩌다가 수 십, 수 백 마리의 개와 함께 살게 되었는지, 왜 인간사회에 동화되지 못하는지, 그가 가진 고통은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럽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감독은 그의 고통을 ..

봄날은간다 2024.01.24

본지는 꽤(?) 되었는데 지금까지 잊고 있다가 이제야 이 영화를 봤다는 걸 떠올렸다. 영화에 대해서 길게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재밌고 인상적인 영화였는데 말이다. 일상 속에서 일어날 법한 소재를 가지고 공포심을 유발하는 영화였는데, 내 예상과는 달리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긴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재미가 있었다. 어느 쪽으로든 극단적으로 갈 것이라는 예상은 했으나 그 방향이 현수(이선균)가 아니라 수진(정유미)이었다는 게 조금 의외였달까. 비뚤어진 믿음은 어떤 식으로든 끝장을 보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했다. 나는 그 사실이 무엇보다 무서웠다. 잊고 지나갈 뻔한 영화였는데 불현듯(어떤 무의식이 작용한 걸까?) 생각이 났다. 이렇게라도 블로그에 ..

봄날은간다 2023.10.08

페노미나

어렸을 때의 강렬한 경험은 오래도록 - 어쩌면 영원히 - 잊히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지문처럼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남는다. 그리하여 그것은 한 사람의 일생을 (어떤 식으로든) 결정짓고 (싫든 좋든) 이끌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 사람의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원형(原形)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라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 실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쓸데없이 거창하게 한 것 같다. 나는 그저 오래전에 본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우연히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서스페리아》의 한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같은 감독의 다른 영..

봄날은간다 2023.09.14

3000년의 기다림

지니가 당신에게 세 가지 소원을 이루어준다고 한다면 당신은 무슨 소원을 빌 것인가? 여기 삼천 년 만에 깨어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 지니가 앞에 있다. 어쩌다 지니라는 거대한 복권에 당첨된 중년의 시니컬한 여교수(틸다 스윈튼)는 소원을 빌 생각은 하지 않고 당장 그가 물러가기를 바란다.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어야만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지니는 그녀에게 어떻게든 소원을 빌도록 애원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겪었던 이야기를 마치 천일야화처럼 들려준다. 헌데 그 이야기라는 것이 다름 아닌 지니의 사랑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마음을 열지 않던 교수는 점차 그에게 동화되고, 결국 그에게 자신을 ― 오래전 그가 열렬한 사랑을 바쳤던 여성들에게 그랬듯 그렇게 ― 사랑해 달라는 소원을 빈다. 이 영화는 사랑에..

봄날은간다 2023.08.04

애프터썬

이것은 사람의 뒷모습에 관한 영화가 아닌가? 함박웃음을 지은채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고,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찍은 행복한 사진 같은 것이 아니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순간에 찍힌 어떤 이의 뒷모습과도 같은 그런 영화. 뒷모습은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는 표정을 가지고 있다. 그런 표정을, 회상의 형식으로 들춰보는 영화였다. 캠코더에 찍힌 아버지의 영상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얼핏 30대 초반의 아버지(캘럼)와 11살 딸(소피)의 잔잔한 여행기로 보인다. 겉으로 봤을 때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부녀의 여행에 특별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 이야기가 어느덧 성인이 된 딸의 회상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다. 그러니까 성인이 된 딸이 아련하고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아버지와의 여행에서 찍었던 ..

봄날은간다 2023.05.29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삶에는 큰 고통이 따르지. 영원한 삶에는 영원한 고통이 따르게 돼 있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요. 매번 조금씩 지치긴 하는데 이번엔 돌아가자마자 아빠 보러 집에 갈 거예요." "그런데, 피노키오, 아버지를 다시 못 보면 어쩌지?" "다시 만날 거예요. 못 만날 리가 없잖아요." "넌 영원히 살겠지만, 네 친구들과 사랑하는 이들은 그렇지 않거든. 그들과 함께하는 매 순간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어.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는 마지막이 되어 봐야 알지." *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를 보았다. 이렇게 슬플 줄 알았더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지 않았다면 더욱 후회했을(좀 이상한 말 같지만 어쨌든), 그런 영화. 피노키오는 그 누구도 아닌 피노키오. 피노키오로 인해 우리는 또 한 번 우리네 삶의 공공..

봄날은간다 2023.05.09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3

무엇이든지 마지막이라는 것은 많든 적든 어떤 슬픔을 내재하고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도 그랬고 반지의 제왕 시리즈도 그랬다. 물론 마블 영화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하며 꾸준히 나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 안에서 각 캐릭터들의 마지막 이야기라는 것은 존재하므로, 그 시리즈의 영화들을 보면 볼수록 역시 조금은 슬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가 그저 단 한 편일 경우에는 크게 인식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하나의 세계관 속 각각의 이야기들이 시리즈로 만들어질수록 우리는 오랜 시간 영화 속 캐릭터들과 함께 커가면서 그것을 지켜보게 된다. 물론 모든 시리즈의 영화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영화는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체험이므로, 내가 그것에 애착을 가지는 만큼 영화가 특별해지는 것은 ..

봄날은간다 2023.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