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239

구부전(舅婦戰)

듀나의 『구부전』을 읽었다. 나는 공상과학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소위 SF 장르물을 거의 읽지 않는데, 이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장르물에 익숙하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공상과학이 다루는 여러 소재들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듀나의 소설은 흥미가 생겨서 찾아 읽곤 한다. 지금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오래전에 『태평양 횡단 특급』을 읽었고, 소설은 아니지만 영화와 관련된 에세이인 『가능한 꿈의 공간들』도 좋았다. 때때로 에 올라온 영화 리뷰들도 즐겨 읽는다. 고정되고 편협한 관념을 뒤흔드는 상상력과 비타협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거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당연하게도 나는 그것들을 읽거나 보지 못했으므로)..

흔해빠진독서 2022.03.01

어떤 특정한 응시의 방식

나는 길을 잃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길을 잃는다.(358쪽, 「브라질리아」) *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달걀과 닭』을 읽었다. 마지막 장을 다 읽고 나니 약간의 현기증이 인다. 길을 잃은 기분이다. 내가 제대로 왔는지 알 수 없어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여긴 어디인가, 하고. 나는 머리를 살짝 짚은 후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표시해 둔 페이지를 다시 펼친다. 그것은 내가 가까스로 그녀를, 이 책을 이해해보기 위한 몸부림이다. 나는 그 문장들 속에서 어떤 실마리를 찾아내려고 애쓴다. 자그마한 단서라도(지극히 개인적이고 편협한 오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붙잡기 위해 주의를 기울인다. 그 문장들은, 그녀의 글 속에..

흔해빠진독서 2022.02.20

오랫동안 나는 슬픔에 대해 생각해왔다

오랫동안 나는 그 일을 생각해왔다. 생각하고 생각해 마침내는 이해해보려고 나는 이 방에 머물고 있다. 오래전, 이 방 바깥에서 내 등을 두드리며 나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 이가 누구였는지 모르겠다. 그의 이름이 뭐였는지 내가 어쩌다 그 사람을 만났는지 그가 내게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조차 기억해낼 수 없다. 밤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어. 컴컴한 모퉁이에서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이 이해할 수 있다는 나를, 나는 왜 이해할 수 없는가.(황정은, '웃는 남자' 중에서 - 소설집, 『아무도 아닌』 수록) * 오래전 황정은의 을 읽었을 때만 해도 나는 이 작가에 대한 막연한 인상만을 품고 있었다. 지금 그 소설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흔해빠진독서 2022.01.16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2008.

이 소설엔 세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서른아홉 살의 매력적인 여자 폴, 폴의 현재 애인이지만 그녀 몰래 바람을 피우는 남자 로제, 폴의 새로운 애인이자 연하의 열성적인 남자 시몽. 말하자면 삼각관계라고 할까. 폴은 로제를 사랑하고 로제 또한 폴을 사랑하지만, 자유로운 로제는 쾌락을 좇아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이를 폴도 알고 있다. 헤어지고자 마음을 먹던 차에 폴은 시몽을 만나고, 폴보다 열네 살이나 어린 시몽은 폴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시몽은 적극적으로 폴에게 구애를 하고 폴은 로제와의 관계에 환멸을 느끼던 차에 잘생기고 헌신적인 시몽을 보자 자연스레 사랑에 빠지고 만다. 폴, 로제, 시몽 이들의 끝은 어떻게 될까?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구조다. 우리들이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삼각관계가 거의 다 이..

흔해빠진독서 2022.01.09

사랑이 아니면, 사랑하지 않으면

아래는 국민서평프로젝트라는 이벤트에 응모하기 위해 썼던 글의 원본이다. 그러니까 분량에 맞춰 내용을 잘라내기 전의 글이다.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더 있는 거 같아서, 저장해둔다는 의미로 여기 올려놓는다. * 언제나 그렇듯 통증은 나를 고립시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 속에 나는 갇힌다. 통증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간으로부터,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온다.(한강, 120~121쪽) * 아픔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에 대해서. 그 순간들은 마치 이 소설을 통해 전이되어 점차 증폭되는 듯 느껴졌으므로. 이 소설을 읽기 전부터 몸에 약간의..

흔해빠진독서 2021.12.06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이 소설을 읽기 전부터 몸에 약간의 통증이 감지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목이 뻐근한 것뿐이라고, 늘 그랬듯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목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었습니다. 목이 아프니 어깨도 아프고, 허리까지 아픈거 같아서 책 읽기를 잠시 중단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강의 소설이 늘 그랬듯 이번 소설도 자꾸만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또한 주인공 경하와 인선이 느끼는 고통이 마치 내게 전이된 것 같은 느낌에 시시각각 사로잡혀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내가 현재 느끼고 있는 이 몸의 고통쯤은 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5월 광주에 이어 제주 4·3 사건이라는 소재의 무게를 한강..

흔해빠진독서 2021.12.03

아무런 말도, 아무런 약속도 없이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

흔해빠진독서 2021.11.23

글은 결국 읽히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이런 류의 책들, 그러니까 소위 실용서들은 정말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면 거의 읽지 않았다. 그저 흥미 위주로 읽기에는 우선 전혀 흥미가 일지 않았고, 간혹 필요에 의해서 읽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독서라기보다는 그저 공부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재미로 공부를 하기도 한다지만 내게 공부란 정말 각 잡고 앉아서 인내심을 가지고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기에, 공부를 위한 독서는 당연하게도 취미로 하는 독서보다 고역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글을 쓰고 싶어 하고 심지어 글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당연히 글쓰기에 대한 책을 한 권쯤은 읽어봤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오래전에 나도 '글은 이렇게 써야 한다'였는지, '당신도 글을 쓸 수 있다'..

흔해빠진독서 2021.1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