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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양자경 주연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개봉할 때 보고 싶었지만 보지 못했다. 내가 사는 곳의 영화관에서는 개봉을 하지 않았거나 해도 아주 극소수의 개봉관에서만 했을 것이다(대부분 내가 보고 싶어 한 영화들은 그랬다). 물론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거나 발품을 팔았다면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게으르고 게을러서, 보고 싶은데 개봉하는 곳이 별로 없구나 하면서 무심히 넘겼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엔 극장 개봉을 놓치더라도 볼 수 있는 루트가 아주 많으므로, 단지 시기의 문제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시기의 문제에 나는 늘 관대하다.  그리하여 이번에 넷플릭스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이 영화는 2022년에 개봉했다. 지금으로 치면 3년이나 전에 개봉했음..

봄날은간다 2025.03.16

단상들

*인사를 하기 전까지는 별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데, 잘 지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라고 내뱉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아쉽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두려운. 이런 게 말의 힘일까. 기대는 없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해야 하는 일에 기대라는 감정을 느낄 수는 없었다. 기대란 어떤 일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고 기다리는 걸 말하는데, 나는 일과 관련해서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20250228)  *탄핵을 둘러싸고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 내 이해의 범위를 넘어선 - 여러 인간 군상들의 발언과 행동을 보면 새삼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깊이(하지만 비관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인간이란 존재의 존엄함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혐오스러움을 먼저 깨닫고 경악하게 되는 것..

입속의검은잎 2025.03.15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2009.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이 두 가지 특성이 몸에 밴 채료는 성공한 턱이 없다, 아니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7쪽)  *  샤흐트는 매우 하얀 얼굴과 가느다란 손가락을 가졌다. 그들은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영혼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 같다.(14쪽)  *  나는 하소연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하소연을 듣고 나면 상대방을 보다 주의 깊게 바라보게 되며, 그에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동정심을 갖게 된다.(15쪽)  *  무엇인가를 잃는다는 것, 그것에도 향기와 힘이 있다.(23쪽)  *  어떤 종류의 솔직함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지루하게 만들 뿐이다.(24쪽)  *  나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너무 우스꽝..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이다

이 문장이, 이승우의 소설 《그곳이 어디든》의 맨 앞장에 나와 있었다. 어쩌면 새로운 것을 발견할 때의 기쁨보다, 어디선가 보거나 읽은 것, 한 번쯤 들어본 것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더 큰 반응(감정)을 느끼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그건 '인간이란 모두 어딘가에 더해진 존재'이기 때문일까. 내가 이승우의 《그곳이 어디든》을 갑자기 들춰보게 된 건, 같은 작가의 산문집 《고요한 읽기》 때문이었다. 그 책에 《그곳이 어디든》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되지는 않지만, 오랜만에 이승우가 쓴 산문집을 읽고 그가 쓴 다른 책들이 뭐가 있는지 보고 싶어졌다. 물론 내가 가지고 있고, 읽은 책들 말이다.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 하지만 언젠가 읽었던 것이 분명한 - 그의 소설들을 보면서 그의 책에 대해서 생각한다..

흔해빠진독서 2025.03.09

고요한 읽기

우리는 문장으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하는 생각은 내 안에서 나온 것이고, 그러니까 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생각은 어떤 문장의 작용 없이는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니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끌려 나와 모습을 보이기까지 그 생각이 내 안에 있었는지조차 모를 테니까요.(이승우, 《고요한 읽기》 중에서)  *내 독서 방법은 이것이다. 우선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문장들이 적힌 페이지를 메모해 둔다. 책을 다 읽으면 메모해 둔 페이지의 문장들을 블로그에 옮긴다. 블로그에 옮기면서 다시 한번 더 그 문장을 읽는다. 그렇게 두 번 정도 읽고(엄밀히 말해 두 번 읽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책을 덮는다. 그렇게 읽은 책을 내 책상 왼 편 - 눈에 잘 띄..

흔해빠진독서 2025.03.08

미키 17

《미키 17》을 봤다. 평소 텅 빈 영화관에 오늘은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지금까지 영화관이 유지되고 있는 게 기적일 정도의 동네에 살고 있다) 그만큼 봉준호 감독의 영향력이 크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영화는 재미있었다. 이전 영화였던 《기생충》과 같은 둔중하고 혼란스러운 충격파는 없었지만, 《옥자》나 《설국열차》가 떠오르면서, 그와는 미묘하게 다른, 이 영화만의 개성과 재미가 있었다. 영화를 보기 전과 후에, 소위 영화평론가들의 별점과 한 줄 평을 읽는다. 당연하게도 영화를 보기 전에 보는 평은, 그 영화에 대한 기대랄까, 대략적인 느낌을 알 수 있다면,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읽는 평은 내 생각과 그들의 말이 어떻게 같고 다른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씨네 21에 올라온 전문가 평 중에 '어느덧 ..

봄날은간다 2025.03.01

단상들

* 신형철은 진은영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의 해설 마지막에 이렇게 썼다.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아름다움, 진은영은 그런 것을 가졌다'라고.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아름다움', 이라는 문장은 얼마나 아름다운지.(20250217)  * 당연한 말이겠지만, 몸이 조금이라도 아프면 온갖 망상과 비극적이고 우울한 생각들이 온몸과 마음을 지배한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듯. 그것이 전혀 치명적이지 않은, 흔하디 흔한 감기 같은 것일지라도. 하지만 아프지 않을 수는 없으니, 몸이 아플 때 정신이 건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20250218)  * 아침에 일어날 때 그날의 피로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물론 어제 쌓였던, 하지만..

입속의검은잎 2025.02.28

이승우, 《고요한 읽기》, 문학동네, 2024.

우리는 문장으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내가 하는 생각은 내 안에서 나온 것이고, 그러니까 내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생각은 어떤 문장의 작용 없이는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니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끌려나와 모습을 보이기까지 그 생각이 내 안에 있었는지조차 모를 테니까요.(6쪽)  *  옛날 사람들은 똑바로 계속 걸으면 세상의 끝에 닿고 낭떠러지로 떨어질 거라고 믿었다. 세상이 평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똑바로 계속 걸으면 언젠가 출발한 자리로 돌아온다는 걸, 세상이 둥글다는 걸 알고 있는 우리는 안다. 둥근 지구에 사는 우리에게는 출발점이 곧 도착점이다. 끝은 시작에 있다. 등뒤에 있는 사람이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다. 등뒤에 있는 사람을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