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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히 고립됐다는 것 아닙니까?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완전히 고립됐다는 것 아닙니까?" 강연에서 누군가가 인간관계에 상처받지 않는 법이 있느냐는 물음에 슬라보예 지젝이 한 말로 보인다. 영상으로 본 것은 아니고 한 장의 사진으로 보았다. 마치 인용하듯 잘라낸 한 장의 사진으로. 그 한 장의 사진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받지 않는 법이 있는가에서부터, 완전히 고립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의미이며 그것은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가... 완전한 고립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은둔수사처럼 속세와의 인연을 끊지 않는 이상. 만약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번뇌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최소한의 인간관계와 그로 인해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상처. 고독이..

어느푸른저녁 2025.02.01

단상들

* 배수아 작가가 작년부터 한국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다시 본다, 고전2〉 시리즈를 읽고 있다. 한겨울에 곶감 빼먹듯, 아까워서 한 편씩,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읽고 있다.(20250117)  * 산책을 하는데 백로인지 왜가리인지 모를 새 한 마리가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내 머리 위로 날아가다가 소나무 위에 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바라보아도 새는 보이지 않는다. 새는 나를 보고 있을까? 보이지 않는 새가 내게 가던 길 가라고 말하는 것 같아 머쓱한 기분으로 다시 걸었다.(20250118)  * 베른하르트의 글에는 치명적인 질병이 자주 등장하여 주인공의 정신세계와 언어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아마도 그 자신이 어린 시절 전쟁을 목격했고 결핵과 늑막염을 앓으며 생명을 잃을 뻔했던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입속의검은잎 2025.02.01

황정은, 《연년세세》, 창비, 2020.

생각이란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생각이 든다고 그 생각을 말이나 행동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버텨보는 것. 말하고 싶고 하고 싶다고 바로 말하거나 하지 않고 버텨보는 것. 그는 그것을 덜 할 뿐이었고 그게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매일 하는 일.(70쪽)  *  아무도 덮고 자지 않은 이불 냄새를 한영진은 좋아했다. 그 냄새는 뭐랄까, 단일했다. 알이라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세상에 나타난 큰 새, 먹지도 자지도 않고 딱 십분 동안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새, 세상에 그런 게 있다면 그 새의 날기깃 냄새가 이럴 것 같았다. 한번이라도 사람이 덮고 잔 이불의 냄새는 이렇지 않았다.(71쪽)  *  잘 살기.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

오직 바람이 말하게 하라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바람이 말하게 하라. 에즈라 파운드는 《칸토스》에서 그렇게 썼다'라고 배수아는 《바우키스의 말》에 썼다. 나는 그 말을 다시 쓴다. 내가 무언가를 읽고 쓴 모든 것들은 그것을 쓴 자의 말을 다시 쓴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그가 쓴 말로 말한다. 그가 쓴 말로 내 말을 대신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최선이라고 느낀다. 그것에 희열을 느낀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의 말에 담긴 아름다움을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한 채 쓰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가 말하게 하라' 여기서 '그'는 내가 읽은 배수아 혹은 페소아다. 혹은 수많은 다른 이름들이다. 아, 오해하면 안 된다. 내가 말한 아름다움은 그저 통상적인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포..

어느푸른저녁 2025.01.27

바우키스의 말

"이승과 그리 멀지 않은 저승 끝에 다다랐을 때 아내를 잃을까 봐 겁났던 오르페우스는 못 참고 고개를 돌려서 그녀가 뒤에 오는지 봤다. 아내는 팔을 뻗어 남편을 안으려 했지만 그 안타까운 손은 허공만 잡을 뿐. 다시 죽은 그녀는 남편을 탓하지 않았다. 사랑이 무슨 죄겠는가? 그녀는 그에게 닿을 수 없는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다시 저승으로 내려갔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중에서)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본 후 나는 배수아의 《바우키스의 말》을 떠올렸다. 아니다. 배수아의 《바우키스의 말》을 읽고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최근에 본 그 영화가 떠올랐다는 게 맞는 말이다.(물론 선후 관계가 중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게 있다면 영화가 소설을, 소설이 영화를 생각나게..

흔해빠진독서 2025.01.25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영화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였다. 영화의 매 장면이 다 미술관에 걸려 있는 초상화요, 풍경화요, 정물화처럼 느껴졌다. 몇 명 되지 않는 등장인물과 군더더기 없이 말쑥한 영화 속 배경과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주인공의 직업인 화가라는 설정과 어우러져 영화 전체가 하나의 움직이는 그림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영화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 원래부터 움직이는 그림을 영화라고 부르지 않는가? 물론 활동사진이 더 맞는 표현이겠지만 말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이 그린 이 그림은 그저 그림은 당연히 아니다. 이상한 말 같지만 나는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이 그림은 영화 속에서 마리안느가 그린 엘로이즈의 초상화처럼, 서서히 곁에 다..

봄날은간다 2025.01.23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문학동네, 2016.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 스토리다.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삼십오 년간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족히 3톤은 압축했을 백과사전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는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온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는 이제 어느 것이 내 생각이고 어느 것이 책에서 읽은 건지도 명확히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9쪽)  *  내 독서는 딱히 읽는 행위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한다. 사상이 내 안에 알코올처럼 녹아들 때까지. 문장은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뇌와 심장을 적..

배수아 - 모공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대사...하이너 뮐러의 희곡은 "읽어야" 한다

오직 감탄하게 되는 언어가 있다. 줄거리에의 몰입, 적당한 정서적 공감, 독서 배경이 뒷받침되는 지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오직 언어 자체에 매혹당하는 체험.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를 잘 알게 되기도 전에, 짧고 순간적일지라도 거의 육체적으로 느껴지는 전율의 체험. 내게 그런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작가 중 하나는 하이너 뮐러이다. 하이너 뮐러는 희곡작가로 알려졌지만 그가 남긴 산문과 시도 희곡 못지않게 아름답고 인상적이다. 뮐러의 희곡이 정치적인 의미나 미학적인 수준에서 비평가들의 관심을 너무도 많이 차지해버리는 바람에 도리어 그의 시나 산문들이 합당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보는 평가도 있다. 그의 산문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산문의 개념과는 좀 동떨어진 것이 많다. 길이가 극도로 짧으면서 막간극을 연상시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