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017

이미 한때 소년이었고 소녀였던 나는

"나는 이미 한때 소년이었고 소녀였으며, 덤불이었고 새였고, 바다에서 뛰어오르는 말 못하는 물고기였으니."   핸드폰 사진첩을 둘러보다가 언제 찍었는지 모를 사진을 발견했다. 언젠가 도서관에 갔을 때 찍었던 것일까? 책의 뒤표지인 것 같은데, 시집일까, 소설일까? 누구의?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이 없어 포기하다 문득 책상 위 책더미에서 시집 한 권을 꺼냈는데, 그것은 진은영의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라는 시집이었고, 이 사진 속 문장들은 그 시집의 뒤표지에 실린 '작가의 말' 같은 것이었다.  한때 '소년이었고 소녀였으며, 덤불이었고 새였고, 바다에서 뛰어오르는 말 못하는 물고기'였던 나는 서로의 '나'를 기억할까. 나는 아마 사랑의 윤회보다도 기억의 윤회를 믿고 싶은가 보다.

어느푸른저녁 2024.11.06

People in the Sun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룸 넥스트 도어》에 등장하는 호퍼의 《People in the Sun》. 나는 호퍼가 인간의 쓸쓸함과 고독을 보여주는데 탁월한 작가라고만 생각했는데, 영화 속에 나온 이 작품은, 영화의 무거운 주제와 어우러져 의외로 따뜻하게까지 느껴진다. 죽음과 대비되어서일까? 물론 각자의 쓸쓸함과 고독을 끌어안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오버랩되면서 잔잔하지만 긴 여운을 느끼게 한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욕조의 따스한 물처럼 적셔오는 평화, 설혹 종말이 눈앞에 다가온다고 해도'

어느푸른저녁 2024.11.04

누군가 취미가 뭐냐고 물어본다면

누군가 취미가 뭐냐고 물어본다면, 독서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결국은 책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 혼자 생각하고, 상상하고, 몽상하며, 착각하고, 오해하는 일을 좋아한다고. 그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나만의 은밀한 기쁨이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터져 나오던 웃음을 나는 잊지 못한다.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듯한 모습도. 그들을 탓하진 않는다. 그들은 순수한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정말 독서를 좋아한다고,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 때문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 대한 의심 때문에.   내 독서는 하염없이 느리고, 더듬거리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성이며, 잊었다가 한참 뒤에야 다시 생각나는 - 결국 책을 찾게..

어느푸른저녁 2024.11.03

단단

남쪽 숲에선 새끼 곰이 깨어났습니다. 자는 동안에도 키는 자랐습니다. 가슴의 흰 반달도 커졌습니다. 곰, 발톱도 길었습니다. 두껍고 새카맣습니다. 자던 자리가 동그랗습니다. 엄마 곰은 어디 가고 없습니다. 빠진 이빨들 흩어져 있습니다. 곰, 외로움 있습니까? 곰, 일어나 앉습니다. 엄마와 약속한 일이 기억납니다. 산골의 다람쥐, 멧돼지, 토끼, 뱀들도 엄마랑 약속합니다. 긴 겨울이 지나면 깨어나기로 합니다. 따뜻해지면 맛있는 것을 먹기로 합니다. 꽃이 피면 같이 놀기로 합니다. 곰, 눈 비비고 기지개도 켜봅니다. 혼자 가만히 엄마 엄마 불러도 봅니다. 곰, 두려움 알고 있습니까? 몸이 가렵습니다. 앞으로 구르고 뒤로도 굴러봅니다. 곰, 배가 고프고 목도 마릅니다. 구멍 밖에서 쑥냄새, 취냄새 향긋하게 불..

질투는나의힘 2024.11.02

단상들

*연꽃이 피어있는 연못을 따라 산책을 했다. 점심시간에 누리는 아주 짧은 사치.(20241016)  *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삶은 우리를 돌멩이처럼 허공으로 던져버렸는데, 날아가면서 우리가 말하는 것이다. "봐, 내가 내 힘으로 나가고 있잖아."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우리는 추락하는 중이며, 누구나 추락할 운명을 타고났다. 태어났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날아가는 중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이다.(20241017)  * 어둠이 내린, 어둠이 스며있는, 어둠에 물들어가는 그런 풍경들, 사진들에 눈길이 머문다. 어둠은 비밀을 품고 있기 때문일까?(20241017)  * 포니정 시상식에서 한강의 수상 소감을 듣는다. 그는 자신..

입속의검은잎 2024.11.01

룸 넥스트 도어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룸 넥스트 도어》를 보았다. 내가 사는 곳의 메가박스에서는 오늘 고작 1개 상영관에서 단 두 번 상영을 했다. 놓쳤으면 아마 한참 뒤에 봤거나, 보지 못하고 잊어버렸을 것이다. 영화관은 나를 포함해서 단 두 명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영화를 본다. 오래전에 그의 《그녀에게》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후에 《나쁜 교육》을 봤는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어렸을 적 트라우마로 고통받던 남자가 자신을 고통에 빠트린 사람을 찾아가 복수를 하는 내용이었던 것 같은데... 암튼 영화가 독특하다는 인상을 받았고, 무척 흥미롭게 본 기억이 있다. 이번 영화는 감독의 첫 번째 영어 영화라고 하는데, 배우가 무려 틸다 스윈튼과 줄리앤 무..

봄날은간다 2024.10.27

어느 날 그는

어느 날 그는 빗방울이 전선에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한꺼번에 바꾸었다. 그러니 정말 흥미있는 이야기는 그 뒤에 비로소 시작되지만, 일단 이 이야기는 그가 전선의 빗방울을 보기 전까지이다.  - 한강, 「어느 날 그는」 중에서(『내 여자의 열매』 수록)    오래전에 읽은 『내 여자의 열매』 속 여덟 개의 소설 중에 지금 기억하는 건, 맨 처음 실린 「어느 날 그는」의 첫 문단이다. 저 문장은 마치 마법처럼 그다음에 나올 이야기를 쫓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기억이란 무엇일까. 나는 지금 그 소설집을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읽는다. 하지만 그 사실이 슬프다기보다는 오히려 기쁘다. 새롭게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처음 읽는 소설과는 다른, '한 번 읽었지만 기억나지 않는 소설을..

어느푸른저녁 2024.10.26

모든 별은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죽는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별의 시간』을 읽고 감상문을 쓴 후, 우연히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와 관련한 유튜브를 보았다. 과거 방송작가였다고 밝힌 유튜버는 한강의 오랜 팬이고, 자신의 방송에 한강 작가가 나와서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한강 작가의 책을 소개하며 한 대목을 읽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 역시 깊은 인상을 받았던 『바람이 분다, 가라』의 한 구절이었다. 모든 별은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죽는다. 그것이 별의 생리이자 운명이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모든 물질은 별로부터 왔다. 별들과 같은 생리와 운명을 배고 태어난 인간은 별들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다가 죽는다. 다른 것은 생애의 길이뿐이다.(17쪽) 그가 읽어주는 저 대목을 들었을 때, 나는 무언가 찌릿한 느낌..

흔해빠진독서 2024.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