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내 차가운 피를 용서해

시월의숲 2008. 12. 5. 21:18

1

차가운 기운이 뼛속까지 스며든 것 같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보일러부터 틀었다. 방안 온도는  13도.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거룩하게 들리고 나는 펴놓은 이불 위에 쪼그리고 앉아 방바닥이 따스해오기를 기다렸다. 손가락끝과 발가락끝, 그리고 코끝이 시렸다.

 

 

2

저녁으로 무얼 해먹을까 고민했다. 냉장고에 들어 있는 거라고는 반쯤 먹다 남은 햄과 계란 여섯 알, 주인 할머니가 주신 김치와 그저께 수퍼에서 사 놓은 마늘장아찌가 전부인데, 새삼 고민하고 있는 내가 우스웠다. 생각해보니 그건 무얼 먹을까에 대한 고민이라기보다 또 무언가를 먹어야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귀찮음 혹은 지겨움이었다. 아, 먹어야 살 수 있다니!

 

 

3

기온은 내려가 무척이나 추웠지만 날씨는 맑았다. 중부지방 어딘가에서는 눈이 제법 많이 왔다는데, 그것이 마치 먼나라 이야기인 듯 느껴졌다. 문득 온천지가 눈으로 덮혀 있는 풍경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자신이 무척이나 더럽게 느껴졌다. 더러운 것은 더럽기 때문에 더러운 것을 갈망하는 것일까 아니면 깨끗한 것을 갈망하는 것일까? 이상한 의문이 든다.

 

 

4

살인사건이 있었다. 서울인가 어디에서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고 이 지역으로 들어온 한 남자가 생활고를 비관해 자식들을 목졸라 죽이고 자신도 목에 칼을 꽂아 자살하려고 했다. 자식들은 죽고 남자는 살았다. 사람들은 절망하면 죽음을 꿈꾼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는?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5

책을 여러 권 빌려 놓고 아직 제대로 읽지 않고 있다. 흥미가 떨어져서일까? 오늘은 <반 고흐, 영혼의 편지>의 앞 부분을 조금 읽었다. 번역의 문제인지, 고흐의 글솜씨가 원래 그런 것인지, 그리 매끄럽게 읽히지 않았다. 그는 화가이지 전문 글쟁이가 아니니 글을 못썼다고 뭐라 할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나한테 온 편지글이거니 생각하고 편하게 읽어야겠다. 읽다보면 아마도 끌리는 것이 있겠지. 내가 그의 그림에 이끌렸듯이. '영혼의 편지'라지 않는가!

 

 

6

며칠 동안 MOT의 cold blood라는 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요즘은 왜 그 노래가 끌리는지 모를 일이다. 내 차가운 피를 용서해. 그 멜로디와 가사가 그림자처럼 내 머릿속에 따라다닌다. 이 날씨보다도 더 차가워지고 싶기 때문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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