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햇살은 따스하고

시월의숲 2009. 4. 7. 19:01

1.

어제, 오늘 무척이나 따뜻한 날씨였다. 초등학교를 지날 때면 들려오는 아이들의 음성엔 생기가 가득하고, 매일 똑같은 자리에서 운동을 하는 할아버지의 움직임도 예전보다 힘차졌다. 벚꽃은 만개해서 가볍게 스치는 바람에도 꽃잎을 떨구고, 사람들의 옷차림과 발걸음도 날리는 벚꽃처럼 가벼워졌다. 나도, 요 며칠의 알 수 없는 무기력에서 벗어나 자비로운 햇살에 몸과 마음을 조금 내어놓을 수 있었다. 계절의 변화에 무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으리라.

 

 

2.

주인집 할머니가 아들네에 가셨다가 돌아오셨다. 혼자 지내는 것도 좋았지만, 할머니가 돌아오니 마치 친할머니를 만난듯 반가웠다. 그래서 마당에 있는 좁고 기다란 화단을, 고추를 심기 위해 갈아엎어달라는 할머니의 부탁에 흔쾌히 승낙했던 것이다. 자그마한 화단이지만, 굳어버린 흙을 삽으로 뒤엎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다 끝내고 났더니 겨드랑이에 땀이 한 줄기 흘렀다. 그래도 좋았다. 햇살이 따스했으니까.

 

 

3.

기대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렸을 때는 모든 것들이 어떤 기대로 가득차서 그것이 이루어지든 그렇지 않든 마냥 좋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하는 것의 헛됨을 깨닫게 되지만, 가끔 나는 그때, 그러니까 온갖 사물들과 계절과 세계가 내게 어떤 기대로 가득찬 기호처럼 느껴졌을 때가 몹시도 그리워진다. 그것은 묘한 설렘과도 맞닿아 있어서 짜릿한 기분마저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일요일 아침,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이불 속에서 반쯤 잠든 채로 하는, 그날 하루에 대한 기대. 할아버지 집에서 나와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걸어갈 때, 저 골목길만 넘어가면 부모님을 볼 수 있다는 기대, 크리스마스 이브날 저녁잠이 들때의 기대, 눈이 오거나 벚꽃이 흩날릴 때의 기대... 그런 기대와 그런 설렘들이 종종 몹시도 그립다. 다시 돌아갈 수 없기에 더욱.

 

 

4.

햇살의 눈부심과 따스함이 때로 슬픔과 아련함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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