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독서

배수아 외,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미디어버스, 2020.

시월의숲 2021. 2. 15. 23:14

 

언젠가 내가 부산에 갔을 때, 부산만큼 다양한 얼굴과 표정을 가진 도시가 있을까 생각했었다. 내가 보고 온 것은 부산의 지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때 나는 어떤 아쉬움 혹은 안타까움을 느꼈던가? 아니면 부산이란 도시의 다양한 얼굴을 조금이나마 보고 온 것에 대해서 어떤 충족감을 느꼈던가? 어쩌면 그 모든 것, 아쉬움과 충족감을 동시에 느꼈던가?

 

그러한 감정과는 별개로, 지금 생각하니 나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몇 번이고 방문한 부산이라는 도시의 아주 미미한 일면만을 보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관광 목적으로 간 부산이라는 도시에서 내가 알 수 있고, 볼 수 있는 건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이 다였다는 것. 해운대의 바다와 모래사장 가까이 모여있는 호텔들, 술집들, 포장마차들, 자갈치 시장의 생선들과 국제시장의 사람들, 밀면과 씨앗호떡 같은 것들. 목적지에 다 와서 몇 번이고 헤매야만 하는, 내비게이션이 무용한 골목들과 산에 가까스로 메달려 있는 것만 같은 아파트와 집들. 건물로 이루어진 산들. 극심한 교통체증 같은 것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부산이라는 도시가 가진 다양한 얼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될 줄 몰랐다. 처음에는 이 책 역시 배수아 때문에, 그의 단편이 실려 있기 때문에 읽게 되었던 것이다. 제법 두툼한 이 책의 제목은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무척이나 심플하면서도 시적인 제목이기도 하거니와, 책 속에는 정말 제목처럼 배수아의 소설을 포함하여 열 장의 소설과 다섯 편의 시가 실려 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이 책의 정체성은 독특하게도 책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으로부터 파생된 전시 혹은 전시를 위해 만들어진 책이라는데 있다.

 

이 책에 실린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는 무려 70인 이상의 시각 예술가와 음악가들에게 주어졌고, 이들은 전시를 위해 기존 작업 중의 일부를 선택하거나 새로운 작업을 제작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 책으로부터 파생된 예술 작품들이 2020년 부산이라는 도시의 여러 곳에서 전시되었다. 부산이라는 도시 자체가 전시장이 된 것이다. 아, 그러보니 2020년은 바로 작년이 아닌가? 작년에는 코로나 사태로 전 세계가 얼어붙던 시기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는 매우 독특한 방식의 비엔날레가 열리고 있었다니. 나는 그 사실이 신기했고, 새삼 인간들이 지닌 예술적 본능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 책은 그렇게 다른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원천으로서의 가치 또한 지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부산이라는 도시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책으로 인해, 보다 다층적이고 다양한 면모의 부산을 느낄 수 있었다. 배수아는 부산의 바닷가로 보이는 곳을 무대로 소설을 시작하여 예의 배수아만의 추상화 혹은 꿈을 펼쳐보이고(배수아, '나는 하나의 노래를 가졌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읽는 박솔뫼는 독특한 서술방식으로 부산의 역사의 한 장면을 상기시키며(박솔뫼, '매일 산책 연습'), 김혜순은 다섯 편의 매력적인 시를, 김금희는 부산을 배경으로 달콤쌉싸름한 로맨스의 기억을(김금희, '크리스마스에는'), 김숨은 일제시대 남포동의 슬픈 역사를 초록의 이미지로 보여주며(김숨, '초록은 슬프다'), 김언수는 마치 느와르 영화를 보듯 부산의 어두운 면모를 흡인력 있게 보여주며(김언수, '물개여관'), 편혜영은 부산에서도 인기있는 야구를 소재로 섬뜩하고도 슬픈 이야기를 들려준다(편혜영, '냉장고'). 그 외에도 마크 본 슐레겔, 아말리에 스미스, 안드레스 솔라노, 이상우도 저마다 개성있는 문체와 이야기로 부산의 다양한 면모를 선보인다. 

 

이 책을 읽고나니, 이 책에 영감을 받아 제작되고 전시되었다는 작품들이 궁금해졌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전시와 관련된 사진들이 올라와 있긴 했지만, 그것은 그저 사진일 뿐, 직접 가서 보는 것에 비하지는 못할 것이다. 특히나 설치 미술이나 음악 같은 것들은 내가 그것을 직접 보거나 듣지 않고는 결코 제대로 말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때마침 지금 읽고 있는 윤광준의 <심미안 수업>에서 미술관이나 전시회장에 직접 가서 보는 것에 대한 감흥과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전시를 볼 기회를 놓쳤다 하더라도 내게는 지금 이 책이 있다. 이 책은 부산이라는 도시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는 프리즘 같다. 그냥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예술작품으로 변주된 도시의 모습 말이다. 나는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이나 시로 형상화된 부산의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 그러므로 배수아의 소설 제목을 살짝 변주하여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나는 부산이라는 여러 개의 노래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