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모든 상실이 사랑을 입증한다

시월의숲 2021. 7. 10. 18:24

책이 잘 읽히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언제나 나는 책을 잘 읽을 수 없었지만, 요즘들어 더 그렇다. 의식이 명료하지 않고 머릿속이 불투명한 안개가 낀 듯 흐릿해서 활자에 집중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는 화상으로 독서모임에 참여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옛 거장들>을 함께 읽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는데, 다들 본인들의 취향에 맞지 않는 책이었다고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어떤 이는 다섯 번씩 읽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은 상당히 진지하고 열성적이며 마음씨가 여린 사람처럼 보였는데, 어떻게 한 책을 다섯 번이나 읽을 수 있는지 신기하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기 때문에,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다섯 번이나 읽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박수를 치며 경의를 표했다. 나는 <옛 거장들>을 재밌게 읽었고, 작가의 다른 책도 읽을 의향이 있다고 말했지만, 한 책을 다섯 번이나 읽을 생각은 하지 못했으므로. 

 

우리들은 돌아가면서 책을 읽은 소감과 첫인상, 기억에 남는 최고의 문장, 작가가 하고 싶은 말, 제목의 의미 등을 말했다. 나는 최고의 문장이라기보다는 가장 핵심적인 문장으로 '나는 사람을 증오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나의 유일한 인생의 목적입니다.(77쪽)'라는 문장을 꼽았다. 내 이야기가 끝나자 어떤 이는 나와 똑같은 문장을 자신도 최고의 문장으로 생각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다른 이는, 작가가 결국 하고 싶은 말은 '나 외로워'가 아닐까 한다고 말했다. 책의 제일 마지막에 주인공인 레거는 자신의 옛 거장들에 대한 장황하고 냉소적이며 가차없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이 그토록 싫어하는 공연을 함께 보러가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결국 이 인물은 본인이 외롭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토록 격렬한 비판을 한 것이며, 그래서 어떻게 보면 참으로 안쓰러운 인물이라고 말했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고 웃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 책을 읽고 새삼 그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내뱉은 그 모든 비난과 혐오와 증오가 결국은 그것을 너무나도 애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누가 부인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모순적인 사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을 알아봐주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게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주인공 레거가 자신의 유일한 동반자였던 아내의 죽음으로 인해 피폐해졌지만 그러한 상실 또한 인간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에 이런 문장이 있다. '아무것도 사랑의 상실을 위로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은 무자비한 증여품이다. 사랑은 잃어버린 것과 연관된다 : 그렇기 때문에 모든 상실이 사랑을 입증한다.(151쪽)'

 

나는 이미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썼으나, 이 글은 그 책에 대한 또다른 감상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눈다는 건 참 신기하고 재밌는 일임에 틀임없다. 어제의 모임이(비록 비대면으로 만난 것이었지만), 요즘의 내 명료하지 못한 정신에도 불구하고 책을 다시 읽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본다. 독서만이 내가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고, 혼자서, 진정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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