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푸른저녁

너는 지금 어디에

시월의숲 2022. 8. 13. 17:11

지금 내가 사는 곳은 축제가 한창이다. 축제라고 하기엔 기간이 생각보다 길다. 8월 6일부터 시작해서 이번 주말을 포함하여 공휴일인 광복절까지 하는데 운이 나쁘게도 거의 매일 비가 와서 주최 측은 좀 난감하지 싶다. 나는 지역에서 하는 축제이긴 하지만 가 볼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서 그냥 지나가는구나 했는데, 어제 본가에 가서 아버지와 저녁을 먹고 나니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축제장을 슬슬 둘러보기로 했다. 

 

지속적인 비의 여파인지 몰라도 축제장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어제는 마침 지루하게 내리던 비도 그치고 바람마저 선선히 부는 날씨여서 걷기도 좋았다. 축제의 주제에 맞는 갖가지 조형물들과 색색의 조명들로 멋을 부린 분수, 버스킹 공연, 여러 가지 체험부스들, 푸드트럭, 물놀이장 등이 익숙한 듯 펼쳐져 있었다. 어스름이 내린 저녁이어서 그런지 물놀이장은 운영하지 않았고, 체험부스들도 천막이 내려진 곳이 많았다. 하지만 메인 무대에서는 지속적으로 트로트나 포크송, 락 등 다양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버지와 나는 푸드트럭에서 파는 커피와 츄러스를 사서 냇가 근처 자리에 앉았다. 냇물 위에는 형형색색의 조명으로 불을 밝힌 조형물들이 쭉 늘어서 있어서 어두워질수록 선명하게 보였다. 아버지와 나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커피를 마시고 츄러스를 먹었다. 그리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강아지들을 구경했다. 축제라는 것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람들에 의한 무엇인데, 그 중심에 사람이 많이 없으니 축제가 축제답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축제라는 것을 좋아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와는 별개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사람이 별로 없는 축제'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앉아 있던 테이블 옆에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나에게 다가와서 OO 아닌가? 맞지? 라며 아는 척을 했다. 나는 커피를 마시기 위해 마스크를 벗은 상태였고, 상대방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를, 나는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이름은 분명 내 이름이었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고등학교 동창일지도 모를 그를 바라보며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전혀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다시 말했다. '너는 하나도 안 변했구나!' 나는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끝내 그의 이름을 묻지 않았다.

 

어렴풋이 생각날 듯했지만 나는 지금도 그를 알지 못한다. 그가 누구였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그와 나는 분명 친하지 않았을 것이고 몇 마디 말조차 나눈 적이 없을 것이다. 내 학창 시절을 통틀어 그랬던 아이는 손에 꼽을 정도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다시 한번 더 그와 마주쳤다. 그는 내 애매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더욱 적극적으로 나에 대해서 물어왔다. '요즘 어디 있어? 강릉에 있다고 들었는데. 옛날에 저쪽에서 너희 어머니가 식당 하지 않으셨던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순간 나는 그가 말하는 '내'가, 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 가보지 못한 도시의 이름과 나조차 알 수 없는 내 어머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그. 그러니까 그는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이름이 같은 누군가와. 나는 적당히 대꾸를 하고 걸음을 재촉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말하는 이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게 나라는 증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게 내가 아니라는 증거 또한 어디에 있는가.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나' 혹은 나와 이름이 같은 누군가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누군지 잊어버린 사람처럼.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는, 거짓말처럼 너무나도 환한 보름달이 검은 하늘 위에 떠 있었다. 나를 지켜보고 있는 단 하나의 눈처럼. 아무런 말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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