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일상 몇 개의 음반과 책을 주문했고, 긴 팔 옷과 외투를 꺼내놓았다. 전기장판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며칠 전까지 열어놓았던 베란다의 창문을 닫았다. 어제 동생 내외가 왔다가 오늘 오전에 갔고, 동생이 가고 난 후, 나는 사택의 내 방으로 돌아와 일주일 동안 모아놓은 빨래를 돌리고, 걸레.. 어느푸른저녁 2014.10.12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타인들도 나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나는 삶에게 극히 사소한 것만을 간청했다. 그런데 그 극히 사소한 소망들도 삶은 들어주지 않았다. 한 줄기의 햇살, 전원에서의 한순간, 아주 약간의 평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의 빵, 존재의 인식이 나에게 지나치게 짐이 되지 않기를, 타인들에게 아무것도 원하지 않기를, 그리고.. 불안의서(書) 2014.10.09
나는 쓴다, 높은 산 위로 가라앉는 불가능한 노을의 색채를 부조리하고 앙상한 내 방 책상 앞에서, 이름 없고 하찮은 사무원인 나는 쓴다. 글은 내 영혼의 구원이다. 나는 멀리 솟아난 높은 산 위로 가라앉는 불가능한 노을의 색채를 묘사하며 나 자신을 황금빛으로 물들인다. 내 석상으로, 삶의 희열을 대신해주는 보상으로, 그리고 내 사도의 손가.. 불안의서(書) 2014.10.05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 문학동네, 2011.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소설 <몰락하는 자>는 여러모로 그의 또다른 소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와 많이 닮았다. 연보를 보면 1982년 <비트겐슈타인의 조카>가 먼저 출간되었고 곧이어 1983년에 <몰락하는 자>가 출간되었으므로 시기상으로도 비슷하다. 하지만 어떤 소설이 .. 흔해빠진독서 2014.10.03
Glenn Gould - J. S. Bach, Goldberg Variations (BWV 988) J. S. Bach, Goldberg Variations (BWV 988), Glenn Gould (1981)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의 <몰락하는 자>를 읽고, 미셸 슈나이더의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를 읽고 있자니,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지 않을 수 없다고. 나는 예전에 그것을 CD를 통해 들었으나, 처.. 오후4시의희망 2014.09.29
토마스 베른하르트, 《몰락하는 자》, 문학동네, 2011. 베르트하이머는 글렌의 죽음을 감당하지 못했다. 자기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 천재보다 더 오래 살게 됐다는 것을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비통스러워했는지 난 안다. 글렌이 죽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이틀 뒤에 글렌의 아버지가 아들의 사망 소식을 알리는 전보를 보내왔다. 피아.. 기억할만한지나침 2014.09.27
이제 가을이에요, 라고 말할지도 기차의 창밖으로 보이는 들판은 온통 노란색이었다. 진한 노랑은 아니었지만, 살짝 연둣빛이 가시지 않은 노랑이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노란빛깔의 들판을 새삼스럽게 바라보았다. 가을, 이라는 말이 입가에 맴돌았다. 누구든 옆에 있었다면 이제 가을이에요, 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아.. 어느푸른저녁 2014.09.27
의미도 생각도 없는 무의식과 재앙 눈앞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일도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내 운명의 눈에는 낯설기만 하다. 심지어 운명 자체도 이들을 모른다. 우연이 던져놓은 돌멩이이며 모르는 목소리의 메아리다. 의미도 생각도 없는 무의식과 재앙이 한꺼번에 뒤섞여 있다. 이것이 삶이다.(29쪽, .. 불안의서(書) 2014.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