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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바람이 분다, 가라》, 문학과지성사, 2010.

아마 물고기는 물이 텅 빈 공간이라고 생각할 거야. 우리가 공기를 마시면서도 허공이 텅 비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허공은 결코 비어 있지 않아. 바람이 불고, 벼락이 치고, 강한 압력으로 우리 몸을 누르지. 그러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눈…… 더 높은 차원의 눈으로 우주의 공간을 볼 수 있다면, 모든 건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거야.(70쪽) * 비명 같은 바람 소리가 밤새워 창틀 사이로 파고들던 그 집은 없다. 살아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나아가야 했던 그 시간은 없다. 그림 없이, 삼촌 없이, 오후의 산책과 따뜻한 김이 오르는 감자 소반 없이도 모든 것이 그대로이던 시간은 없다. 보이는 모든 사물이 주먹질하듯 내 얼굴을 향해 달려들던 시간, 힘껏 부릅뜬 내 눈을 통과해 흩어지던 시간은 없다.(3..

Dear, Cloud

1. 아침에 눈을 떴는데 알람이 아직 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핸드폰 폴더를 열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7시 35분. 화들짝 놀라 일어난다. 주말이라 핸드폰 알람기능을 해지해 놓은 채 그냥 두었던 것이다.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우유에 만 씨리얼을 먹고, 옷을 챙겨 입은 뒤 집을 나선다. 비가 내려 날은 흐리고, 추운 날씨에 장갑을 끼지 않은 나는 우산을 든 손을 연신 바꿔가며 걸음을 걷는다. 도로는 간밤에 온 눈과 비로 반쯤 얼어붙어 있다. 서걱서걱, 질척질척. 아이들은 우산을 든채 경사진 도로를 빠르게 내려오다가 몇 번이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선다. 옷이 지저분해지면서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이들은 특유의 재잘거리는 웃음을 연거푸 터뜨리며 내곁을 스쳐 지나간다. 매서운 추위와 질척이고 미끄..

어느푸른저녁 2010.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