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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지금 어디에

지금 내가 사는 곳은 축제가 한창이다. 축제라고 하기엔 기간이 생각보다 길다. 8월 6일부터 시작해서 이번 주말을 포함하여 공휴일인 광복절까지 하는데 운이 나쁘게도 거의 매일 비가 와서 주최 측은 좀 난감하지 싶다. 나는 지역에서 하는 축제이긴 하지만 가 볼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서 그냥 지나가는구나 했는데, 어제 본가에 가서 아버지와 저녁을 먹고 나니 마땅히 할 일이 없어서 축제장을 슬슬 둘러보기로 했다. 지속적인 비의 여파인지 몰라도 축제장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어제는 마침 지루하게 내리던 비도 그치고 바람마저 선선히 부는 날씨여서 걷기도 좋았다. 축제의 주제에 맞는 갖가지 조형물들과 색색의 조명들로 멋을 부린 분수, 버스킹 공연, 여러 가지 체험부스들, 푸드트럭, 물놀이장 등이 익숙한 듯 펼쳐져 있..

어느푸른저녁 2022.08.13

당신들 모두 같은 생각인가요?(영화, 『비상선언』)

이 영화는 테러리스트와 인질의 관계 혹은 테러의 이유 같은 것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테러 이후 남겨진 사람들(테러를 당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혹은 테러를 당한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갈등과 서로 간의 이기심(이타심을 빙자한)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 이 영화는 테러리스트의 응징과 승객들을 구출하는 영웅 서사가 중심이 되는 액션 영화가 아니라 테러를 통해 촉발되는 인간들의 이기심에 관한 영화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영화를 설명하기에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 빈약하거나 때로는 너무 넘친다. 인간의 이기심과 희생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너무 단선적으로 그리고 있어서 빈약하고, 그것을 둘러싼 드라마가 너무 감정적―소위 신파적―이라서 과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

봄날은간다 2022.08.09

부엉이에게 울음을

"나는 다락방의 먼지에서 홀로 자라난 아이였다. 내가 오직 다락방에서 생애 초반기의 대부분을 홀로 보낸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안에 아무렇게나 쌓여있으면서 더 이상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책들을 홀로 들춰보는 재미를 알았기 때문이다."(116쪽) 그렇게, 다락방의 먼지에서 홀로 자라난 아이는 스물아홉 살에 두 번째 이혼을 결정하고 그즈음 막연하게 작가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다. 두 사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는 잊고 있던 과거의 다락방 시절을 떠올린다. 자신이 '책들의 바다에서 홀로 표류하던 시절' 그러니까 '다락방의 먼지에서 홀로 자라던 시절'의 기억을. 그 시절을 그녀는 '홀로'의 세계라고 명명한다. 그곳은 '벽과 벽 사이의 좁은 공간..

흔해빠진독서 2022.08.08

선물은 많은 얼굴을 가진다

문득 오래전에 본 샤를로뜨 갱스부르 주연의 가 생각났다. 안나 파퀸이 어린 제인 에어로 나왔던. 영화 속에서 제인 에어는 로체스터에게 "A presents has many faces"라고 말한다. 나는 그 영화를 생각하면 그 장면이 유독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는 그때 무슨 영문인지, 한 인간이 가진 다양한 본성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 영화가 생각난 것인데, 물론 그 대사는 선물의 다양한 면(의도)에 대해서 한 말이었지만, 그 문장 속에 들어있던 'faces'라는 단어 때문에 아마도 '다양한 본성'에까지 생각이 미친 것이리라. 두서도 맥락도 없는 내 생각은, 인간의 어떤 면이 본성이라면 바뀔 수가 없는 것인지, 바꿀 수 있다면 바꿔야만 하는 것인지, 본성을 솔직히 인정하고 드러내야 하는 것인..

어느푸른저녁 2022.08.08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재밌다고들 하지만 나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일》, 바다출판사, 2018.

우리는 모두 자기 뇌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는 것, 그로 인한 자기중심주의는 모든 인간의 기본 설정이라는 것,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에 대한 연민과 깨어 있는 의식으로 그 한계와 지루한 일상 속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12쪽, '엮고 옮긴이의 말' 중에서) * 대중적 호화 크루즈 여행에는 견딜 수 없이 슬픈 무언가가 있다. 견딜 수 없이 슬픈 것이 으레 그렇듯 이것은 정체를 파악하기는 엄청나게 어렵고 원인은 복잡하지만 결과는 단순한 듯하다. 그 결과란, 내가 네이디어 호에서―특히 밤에, 배의 놀이 활동과 안심과 즐거운 소음이 다 그친 뒤에―절망을 느꼈다는 것이다. 절망이라는 단어는 워낙 남용되어 이제 진부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진지한 단어이고, 나는 지금 이 단어를 진지한 의미로 쓰고 있다. 내게..

배수아, 「부엉이에게 울음을」(『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수록)

두 번째 이혼을 결정했을 때 나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리고 그즈음 막연하게 작가가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두 사건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115쪽) * 마치 누군가, 배우와도 외국과도 관련이 없이, 그렇게 즉흥적으로 타자기에 쳐 넣었을 뿐,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임의의 글자와도 같은 것. 구체적인 사건이 아니라서 더욱 매료시키는 것.(115쪽) * 나는 다락방의 먼지에서 홀로 자라난 아이였다. 내가 오직 다락방에서 생애 초반기의 대부분을 홀로 보낸 이유 중의 하나는 그 안에 아무렇게나 쌓여있으면서 더 이상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는 책들을 홀로 들춰보는 재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위의 문장들에서 가장 의미심장하며 결정적인 어휘는 ..

실존적으로 혐오스러운 존재

내게 단체 관광객이 된다는 것은 곧 어엿한 현대 미국인이 된다는 뜻이다. 그 장소에 어울리지 않고, 무지하고,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에 늘 욕심을 내고, 결코 인정할 수 없는 방식으로 늘 실망하고 마는 미국인이. 그것은 내가 애초에 경험하겠다고 찾아갔던 훼손되지 않은 무언가를 얄궂게도 그런 내 존재로 훼손하는 일이다. 내가 없다면 경제적 측면 이외의 모든 면에서 오히려 더 좋고 더 진실된 장소가 될 곳에 나를 억지로 끼워 넣는 일이다. 기나긴 줄, 답답한 정체, 반복되는 흥정을 겪으면서, 너무나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내버릴 수도 없는 나 자신의 어떤 부분을 직시하는 일이다. 관광객으로서 나는 경제적으로는 유의미하지만 실존적으로는 혐오스러운 존재가 된다. 시체에 들러붙은 벌레 같은 존재가 된다.(..

어느푸른저녁 2022.07.30

너의 이름은

오랜만에 울진 성류굴을 다녀왔다. 7월 초에 다녀왔는데 이제야 생각을 좀 정리할 수 있었다. 아니, 생각의 정리라기보다는 문득 다시 생각났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나는 문득 울진의 성류굴이 생각났고, 그래서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고, 사진 속 동굴의 기기묘묘한 형상에 다시 한번 놀랐으며, 오래전 몇 번 다녀왔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으며, 그래서 이번이 처음 방문하는 것처럼 느껴졌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통상 그러하듯 나는 동굴이 거쳐왔을 오랜 시간들(감히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을 상상하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이 가진 유한함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모든 동굴은 시간의 집적이 돌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곳이 아닌가. 그곳에서 우리들은 한없이 티끌만 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식상하고도 부..

토성의고리 2022.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