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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의 예감

기억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기억들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고, 그저 무심히, 평범하게 스쳐 지나갔던 장면들이 불현듯 생생히 떠오를 때가 있다. 한때 나와 함께 숨을 쉬며 내 곁에 영원히 머물 것처럼 여겨지던 사람들은 모두 사소하고도 특별할 것 없는 기억으로 내게 남겨졌다. 그들과 함께 했던 많은 추억들에도 불구하고 문득문득 떠오르는 장면들은 그저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집을 나설 때, 우연히 뒤돌아본 풍경 속에 나를 바라보며 서 있던 그의 모습, 같은 것들이다. 그것은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장면이지만 '우연히' 각인되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짐짓 아닌 척 하지만, 나는 예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때, 뒤돌아 본 풍경 속의 그의 모습이 내가 그를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차마 그것..

어느푸른저녁 2022.09.06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서 단 한 줄의 문장도 쓰지 못할지라도, 그래서 거의 그것을 잊은 채로 지내더라도, 언젠가는 책이 먼저 말을 걸어줄 것임을 이제는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때까지 조바심 내지 않고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거의 그것을 잊은 채로. * 나는 저 문장을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을 읽은 지 7년 만에 썼다. 처음 읽고 나서는 단 한 줄의 문장도 쓰지 못했지만, 무슨 조화인지 무려 7년 만에 나는 그 소설이 다시 생각이 났고, 그렇게 생각나는 대로 쓰게 된 것이다. 그 책처럼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나는 배수아의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를 올해 초에 읽고 지금까지 어떤 말도 쓰지 못했다. 『자화상』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이 책을 내 책상 위 보이는 곳에 늘 놓아두었다는 것이다. 그..

흔해빠진독서 2022.08.30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각이

모처럼 장거리 출장을 다녀왔다. 고속도로가 아니라 국도를 이용했다. 확실히 국도로 다니는 것은 주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풍경은 비에 씻긴 듯 선명했으며 산 중턱은 안개구름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풍경은 신비하게도, 음험하게도 보였다. 제법 큰 강과 좁은 다리를 지났다. 강 근처에 자리 잡은 오래된 마을을 지났다. 빛바래고 옹색한 간판들이 비에 젖어 더욱 남루하게 보였다. 장사를 하는지 의심스러운 낡은 간판을 단 다방이 있었고, 중국집이 있었고, 작은 식당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거의 땅에 닿을 것처럼 허리가 굽은 노인이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도로를 천천히 횡단하고 있었다. 커다란 트럭들이 지나가며 물보라를 일으켰고, 라이트를 깜빡이며 쏜살같이 지나가는 자동차에 놀..

어느푸른저녁 2022.08.29

슬프지만 슬프지만은 않은

황정은의 『백百의 그림자』를 읽었다. 나는 이 소설을 무재와 은교의 사랑 이야기로만 읽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만 읽는다는 건 은교와 무재의 입장에서는 좀 억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소설은 그들의 사랑을 절제된 문장으로 꾹꾹 눌러 담고 있지만, 그들을 둘러싼 암울하고 허망한 상황 역시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에. 오히려 그 속에서 그들의 행보가 좀 더 빛 쪽으로 한걸음 다가가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에 자신이 먹히는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지는 않도록. 사람들이 슬럼가라고 부르는 곳에서, 곧 철거가 될 건물에서 근근이 삶을 이어온 사람들에게 그곳은 일터 이상의 장소일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라나 그곳에서 일하며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부모가 진 빚..

흔해빠진독서 2022.08.21

황정은, 《백百의 그림자》, 창비, 2022.

그림자 같은 건 따라가지 마세요.(10쪽) * 무재씨, 춥네요. 가만히 서 있어서 그래요. 죽겠다. 죽겠다니요. 그냥 죽겠다고요. 입버릇인가요. 죽을 것 같으니까요. 무재씨가 소매로 풀 즙을 닦아내고 똑바로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죽을까요? 여기서,라고 너무도 고요하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겁을 먹었다. 새삼스럽게 무재씨를 바라보았다. 나보다 조금 키가 커서 내 눈높이보다 한뼘 반 정도 위쪽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눈이었다. 평소엔 좀 헝클어진 듯 부풀어 있던 머리털이 빗물에 젖어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은교씨, 하고 무재씨가 말했다. 정말로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아무렇게나 죽겠다고 말하지는 말아요.(12~13쪽) * 그래서 어떻게 되나요. 소년 무재의 부모는 개연적으로, 빚을 집니..

취한 말들을 위한 여름

이방인, 나는 밤과 낮의 수평선에 이르러 있다. 백피증 걸린 저 땅끝, 질긴 바다. 이방인, 몇 잔의 술로 데운 열대야가 내 안에서 습하다. 이방인, 여름이라 이곳에선 알코올 냄새가 난다. 담배를 꼬나물고 권총을 허리에 차고. 백사장 앞 부채 파는 좌판은 날벌레들로 점박이가 된 형광등이 훤하다. 이방인, 오늘은 반드시 추워야 한다. 내일부턴 춥지 않을 것이다. 왜 몸의 바깥을 맴도는 온도들뿐인가. 왜 몸으로 들어오는 온도들은 없는가. 이방인, 나의 내부가 다른 내부에 닿아야 나는 흥분된다. 필시 몸이 몸으로 전염되는 거겠지. 성애도 성에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찰나는 극(劇)인가 극(極)인가. 이방인, 내부라는 모국을 떠나는 심정으로 너에게 말하고 있다. 파라솔이 더운 바람으로 축축하다. 그 밑으로 펼쳐..

질투는나의힘 2022.08.20

권진규의 테라코타

인간 속에는 심지가 있는가 상처가 있는가? ··· 속이 빈 테라코타가 인간의 속에 대해 속의 말을 한다. 인간에게 또 어떤 다른 속이 있었던가? - 황동규, 「권진규의 테라코타」 중에서 * 미술을 전공하지도, 열렬한 미술 애호가도 아닌 나는 그저 미술 작품들이 주는 특이한(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느낌들이 그저 좋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느낌들을 느낌으로만 흘려버리는 것이 아쉬워서, 미술 작품들이 건네는 느낌의 언어들을 조금이나마 구체적으로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관련 책도 읽고, 아주 가끔 전시회도 가곤 한다. 그러다 우연히 매혹적인 작품을 만나기도 하는데, 조각가 '권진규'도 이를테면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레 만나게 된 매혹적인 이름이었다. 나는 그때 인터넷 서점으로 미술 관련 서적을 보고 ..

어느푸른저녁 2022.08.18

우리는 정말 그런가

오래전에 시를 쓴다는 후배가 내게 책 한 권을 선물로 주었다. 후배는 그 책을, 다름 아닌 자신의 누나에게서 받은 것이었는데, 책 속에 누나가 자신에게 보내는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 아래에 자신이 내게 보내는 마지막 인사말을 태연히 적어 놓았다. 나는 그 무신경함에 웃고 말았지만, 어쩌면 그때 그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게 전부였으리라. '안톤 체호프'라는 이름은 그렇게 내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후배가 한 말이 생각난다(혹은 편지에 썼던가). '우리는 모두 하얗습니다.' 우리는 정말 그런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니.

어느푸른저녁 2022.0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