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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 애국자들이 증오한 작가 베른하르트...공포·환각·독설 아래 그가 숨긴 것은

어느 해 겨울 나는 베른하르트의 책만 읽고 있었다. 마침내 보다 못한 베를린 서가의 주인이, 당장 베른하르트 읽기를 중단하고 다른 작가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베른하르트에 심취해본 독자라면 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북독일의 기후 아래서, 그것도 침울하고 어두운 기나긴 겨울 내내,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시골 마을의 오두막에서 베른하르트만 읽고 있으면 마음에 병이 들기 쉽다고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책 속에서 베른하르트는 독설을 퍼붓는다. 그의 음산한 저주는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향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두 망쳐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그로테스크한 연극조로 과장되었다. 절반쯤 광증을 가진 자의 기나긴 독백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수목한계선 위의 황폐한 고원처럼 끝이 보이지 ..

배수아 - "입에 포도주를 붓자 소녀가 죽어버리고"...시대가 질식사시킨 작가의 독백

독일 베를린 서가의 주인은 말했다. 도저히 잊지 못할 만큼 깊은 인상을 받은 책이 있는데, 주변의 친구들 중 아무도 그 책을 읽었다는 이가 없어서 매우 놀랐던 경험이 있다고. 그의 주변인들이 모두 어떤 식으로든 문학 관련자인 것을 생각하면 그의 놀라움은 당연하다. 어느 날 그는 책들로 가득한 방에 초대받았다고 했다. 사방 벽의 책장을 채운 것은 주어캄프 출판사가 현대 세계문학의 고전이라고 할 만한 작품들을 선정해 심플한 디자인으로 출간한 비블리오테크 주어캄프(BS) 시리즈였다. 책등을 하나하나 살피던 그는 처음 보는 작가의 책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책을 펼친 후 첫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 속에서 서서히 영혼을 잠식하는 상처가 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

배수아 - 詩를 지운 문학이 포르노로 읽히고 말 때...뒤라스의 '연인'

30년이 지난 뒤 연인을 만났다,라고 나는 어느 책의 첫 문장을 썼다. 대학 시절의 어느 날, 나는 개가식 도서관 서고를 산책하다가 처음으로 연인과 마주쳤다. 도서관의 문학 코너는 대학생인 내가 가장 사랑하던 장소였다. 강의가 없는 시간이면, 혹은 때때로 강의가 있는 시간이라도 나는 거의 그곳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곳은 내가 아는 단 하나의 도피처였다. 다름 아닌 젊음과 청춘으로부터의 도피처. 나는 책들 사이를 거닐면서 커다란 유리창이 석양빛으로 불그스름하게 물드는 저녁까지 오후 내내 이어지는 산책을 했다.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책들을 건드리면서 걸었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연인. 그는 나를 단번에 사로잡았다. 첫 만남의 순간부터 나는 연인이 뿜어내는 숨 막히는 호흡을 실제로 들이마실 수 있었다. 그것..

단상들

*조금 덜 외롭기를.(20250101)  * 2025년이라고 써놓고 한참을 바라본다. 아직 좀 더 친해져야 할 듯.(20250101)  * 대다수 국민들의 속을 뒤집어 놓고 화를 돋우며 정신을 고문하는 것이 저들의 전략이라면, 저열할지라도 아주 잘 먹히고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 애쓰지 말자. 정신 건강에 해롭다.(20250104)  * ‘은밀한 생’에서 커피를 마시며, ‘은밀한 생’을 찾는 은밀한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며, 사람들을 만나고, 애도하고, 분노하고 때로 기뻐하며 소소한 일상을 살아갑니다. 이 보통의 삶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요즘 들어 그런 의문이 더욱 커집니다. 이 삶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20250104)..

입속의검은잎 2025.01.17

뜨겁고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겨울숲은 서걱서걱 소리가 난다. 물기 없는 마른 가지들과 종잇장처럼 마른 이파리들이 서로 부대끼며 내는 소리. 하루종일 모니터만 노려보다가 오후에 잠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숲의 소리를 듣는다. 감았던 눈을 뜨고 저 멀리 산을 바라본다. 나는 지금 겨울의 한가운데 서 있구나. 그렇게 서서 겨울을 바라보고 있구나. 그래, 나는 살아 있구나. 뜨겁고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어느푸른저녁 2025.01.15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잊고 살았구나

핸드폰을 보다가 문득 오래전에 받은 문자나 카톡을 정리할 때가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당시에는 필요에 의해서 주고받았을,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이제 그만 빠져나오고 싶어서랄까. 그런데 이상하지, 지난 문자들을 볼수록 쓸쓸해지는 건.  나는 지금껏 너무 많은 것들을 쉽게 잊고 살았구나, 쉽게 놓치고 살았구나 싶어서. 누군가의 결혼과 부고 소식들, 오래 만났던 모임의 파기를 알리는 소식들, 안부를 묻는 소식들을 너무 모른 채로 지나쳐왔구나 싶어서. 어쩔 수 없었을 테지만, 이 쓸쓸함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내게 남겨진 고립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이리라.

어느푸른저녁 2025.01.15

아닌 건 아닌 거라고

며칠 전 백골단을 자처하는 자들이 어느 국회의원의 주도로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했다는 뉴스를 보고 이건 정말 아닌데 싶어 화가 났다. 며칠 뒤 아버지를 만나 그때 보았던 뉴스 이야기를 하는데 그만 버럭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아니, 내가 생각했던 '이건 아닌데'가 바로 아버지였다니! 나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아닌데,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건 아닌 거라고, 아무리 그래도 내 아버지인데, 아닌 건 아니라고 말씀하시겠지 싶었는데, 정말이지, 아닌 건 아닌 거였다. 아버지를 상대로 이게 뭔가 싶어 흥분을 가라앉히고 갑자기 소리를 질러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래, 화가 나면 지는 거라고 했다. 아버지를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이기기 위해서, 나는 나를 다스릴 필요가 있다...

어느푸른저녁 2025.01.13

모든 책은 읽히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책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책은 읽히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어느 책 유튜버의 영상을 보고 깨닫게 되었다. 그는 말한다. 오랫동안 살아남은 책들은 결코 그 책이 쉽게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의도를 잘 숨기는 책이야말로, 비밀로 가득한 책이야말로, 소비되지 않는 책이야말로 진정한 책이라 불릴 수 있다고. 포르노적인(오로지 보여주기 위한) 책,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결코 책이 아니라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의 말은 일부분만 맞는 것 같다. 현란한 수사나 공허한 묘사로 가득한 책, 오로지 팔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책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 책의 존재 이유를 잘 읽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서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쉬운..

어느푸른저녁 2025.0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