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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은 읽히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책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모든 책은 읽히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어느 책 유튜버의 영상을 보고 깨닫게 되었다. 그는 말한다. 오랫동안 살아남은 책들은 결코 그 책이 쉽게 읽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자신의 의도를 잘 숨기는 책이야말로, 비밀로 가득한 책이야말로, 소비되지 않는 책이야말로 진정한 책이라 불릴 수 있다고. 포르노적인(오로지 보여주기 위한) 책,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결코 책이 아니라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의 말은 일부분만 맞는 것 같다. 현란한 수사나 공허한 묘사로 가득한 책, 오로지 팔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책은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 책의 존재 이유를 잘 읽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서만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오히려 쉬운..

어느푸른저녁 2025.01.12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물은 죽은 사람이 하고 있는 얼굴을 몰라서 해도 해도 영 개운해질 수가 없는 게 세수라며 돌 위에 세숫비누를 올려둔 건 너였다 김을 담은 플라스틱 밀폐용기 뚜껑 위에 김이 나갈까 돌을 얹어둔 건 나였다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던 순간이 그러고 보면 사랑이었다 - 김민정, 〈아름답고 쓸모없기를〉 중에서 김민정 시인의 이 시집을 언제 샀는지 모르겠다. 확실히 기억나는 것은 내가 이 시집을 경주의 황리단길에 있는 작은 책방에서 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인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어느 시기에 나는 이 시집을 샀고, 핑크색의 이 시집은 내 책상 위에 몇 년인지도 모를 시간 동안 내내 놓여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나면 시 한 편씩 혹은 기분 내키면 몇 편씩을 읽고는 다시 덮어두기를 반복했다. 오랜 ..

흔해빠진독서 2025.01.05

듀나, 《옛날 영화, 이 좋은 걸 이제 알았다니》, 구픽, 2022.

수많은 영화는 편견의 범죄 증거입니다. 앞으로 여러 번 이야기할 텐데, 실제 세계와 이를 투영한 동시대 영화 사이에는 늘 팽팽한 긴장감이 돕니다. 이를 제대로 읽으려면 여러 시대, 여러 공간의 실제 작품을 보면서 경험을 쌓는 수밖에 없어요. 간접 정보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결국 남의 눈이고 남의 생각이니까요. 오독하고 실수하더라도 일단은 직접 보는 수밖에.(16쪽)  *  우리가 옛날 영화를 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세대의 영화는 지난 1세기 넘게 쌓아온 영화사의 끄트머리일 뿐입니다. 지금의 영화만 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수많은 영화적 체험이 과거의 영화들 속에 있습니다.(24쪽)  *  걸작만으로 이루어진 영화 경험은 그냥 빈약해요. 이건 여러분도 알고 있습니다. 걸작만 보시나요?..

바서부르그의 열흘

2007년(무려!) 가을호인 《작가세계》는 배수아 특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거기에 이라는 배수아의 산문이 실려 있는데, 작가가 독일의 바서부르그에 머물면서 마르틴 발저를 만나러 간 일화가 나온다. 그는 발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태도는,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서둘지 않았고, 상대편에게 말이나 해명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자기 자신도 해명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유머가 있는가 하면 너그러운 면모도 충분히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끝맺는다.   '세월이 흐르면 그 기억들이 자연스레 희미해지겠지만, 그때 나는 너무나 슬플 것이다'  나는 《작별들 순간들》에서도 그랬지만, 그가 말하는 숲과 정원이, 그가 말하는 바서부르그가, 베를린이, 나아가 독일이라는 나라가 특별하..

흔해빠진독서 2025.01.01

2025년이여 오라!

2025년 새해 첫날은 감기 기운과 함께 시작되었다. 어제부터 피로가 갑자기 몰려오더니 오늘 눈을 뜨니 몸이 무겁고 목이 아팠다. 늦잠을 자고 일어났으면 기분이 좋아야 할 텐데, 불쾌한 기분으로 새해 첫날을 시작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핸드폰에는 자는 동안 날아온 카톡과 문자가 가득 쌓여 있었다. 부지런한 이들은 새해 첫날 일출 사진을 찍어 올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인사를 했다. 나는 속초와 영덕, 울릉도 등에서 찍어 올린 일출 사진을 보며 저것이 새해 첫 태양이구나 생각했다. 다들 열심히, 삶을 의미 있게 누리기 위해 애쓰고 있구나 싶었다. 그에 비해 나는 시간이 가는지 오는지 크게 상관하지 않은 채로,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간다는 사실에는 몸서리치며 각지에서 올라온 일출 사진을 -..

어느푸른저녁 2025.01.01

단상들

* 나는 익명으로 남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익명의 시골 익명의 마을에서 익명의 여자와 익명의 사랑을 나누어 역시 익명의 가족을 이루고 익명의 인물들을 모아 새로운 익명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 에밀 아자르, 《가면의 생》 중에서   익명의 세계에서 익명으로 한 사람으로서 알려지고 싶은 욕망이란 것이 말이 되는 말인가? 가끔 익명의 세계와 익명이 아닌 세계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 간격에 대해서.(20241215)  * 요즘엔 뭘 먹던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음식을 많이 먹는다는 말이 아니라, 조금일지라도 내가 먹는 음식의 성분이(딱히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과하다는 느낌이. 한강의 《채식주의자》나 〈내 여자의 열매〉의 주인공의 시작이 이랬을까? 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지..

입속의검은잎 2024.12.31

하얼빈

'불을 들고 어둠 속으로 걸어갈 것이다' 우민호 감독의 영화 《하얼빈》은 안중근의 저 대사로 끝난다. 하지만 끝이 아니라 시작처럼 느껴진다. 아마도 지금 대한민국 역시 혼란한 시국이어서 그럴 것이다. 나는 감독이 저 대사를 위해서 이 영화를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이 영화는 특히나 아쉬움과 열광의 가운데 있는 느낌이다. 누군가는 《명량》이나 또 다른 안중근 영화인 《영웅》, 《남한산성》을 언급하면서 이 영화의 포지션을 가늠하기도 한다. 나 역시 영화를 보고 난 후 그 영화들이 떠올랐다. 분출되는 감정의 양으로 보자면 제일 위에  《명량》이, 중간에 《남한산성》 이, 제일 아래에 《하얼빈》이 놓여 있지 않을까. 그만큼 이 영화는 관객의 감정을 크게 동요시키지 ..

봄날은간다 2024.12.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