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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 양을 가진 목동

(제24회 오늘의 작가상 배수아 리뷰 대회 심사 소감) 좋아하지 않고 특별한 재능도 없기 때문에 어쩌다 요청이 들어와도 항상 거절하는 일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문학작품의 심사이다. 이번 알라딘 리뷰 선정 작업이 그런 ‘심사’에 속한다고 가정한다면, 나로서는 매우 예외적인 일을 한 셈이다. 그리고 분명 예외적인 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즐거웠고, 그 과정 중에 간혹 놀라웠다고 말하고 싶다. 어려움이란 단지 그중의 몇 개를 골라내는 일, 게다가 골라낸 그것들에 순위를 매기는 일이었다. 서점이란 장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에 책 구입은 항상 온라인 서점에서 하지만, 단 한 번도 서평을 올린 적이 없는 나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정성스럽게 『뱀과 물』에 대한 서평을 썼다는 사실..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2008.

이 소설엔 세 명의 주인공이 나온다. 서른아홉 살의 매력적인 여자 폴, 폴의 현재 애인이지만 그녀 몰래 바람을 피우는 남자 로제, 폴의 새로운 애인이자 연하의 열성적인 남자 시몽. 말하자면 삼각관계라고 할까. 폴은 로제를 사랑하고 로제 또한 폴을 사랑하지만, 자유로운 로제는 쾌락을 좇아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이를 폴도 알고 있다. 헤어지고자 마음을 먹던 차에 폴은 시몽을 만나고, 폴보다 열네 살이나 어린 시몽은 폴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다. 시몽은 적극적으로 폴에게 구애를 하고 폴은 로제와의 관계에 환멸을 느끼던 차에 잘생기고 헌신적인 시몽을 보자 자연스레 사랑에 빠지고 만다. 폴, 로제, 시몽 이들의 끝은 어떻게 될까?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구조다. 우리들이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삼각관계가 거의 다 이..

흔해빠진독서 2022.01.09

청춘이란 그런 것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도 짐승 같은 것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끄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건 그런 쬐끄만 기계 중의 하나와 같은 거야.(앤서니 버지스, 《시계태엽 오렌지》 중에서) * 그래, 청춘이란 그런 거겠지. 내면에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충동이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것, 그래서 주변의 것들에 이리저리 부딪히고야 마는 것. 난감해지기 일쑤지만, 그것이 난감한 일임을 그때..

어느푸른저녁 2022.01.09

돈 룩 업

* 이토록 신랄한 풍자라니.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인간에 대한 애정은 자취를 감추고 '죽어도 싸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인간은 이렇듯 어리석고, 배우지를 못하며, 구제불능인 존재라는 걸 일깨워주는 영화랄까. 굳이 혜성의 충돌이라는 상황이 아니라도 충분히 우리는 지금 위기의 상황에 직면하고 있다. 듀나는 이를 기후위기의 은유라고 볼 수 있다고 했는데,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우리는 혜성의 충돌이라는 외부적인 위기 상황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자기 파괴적인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지구상 최고의 생물체라 스스로 일컫는, 모든 생명체 중 가장 뛰어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우리, 인간 종족은 그 뛰어난 우수성으로 인해 스스로 파멸의 구렁텅이로 걸어 들어가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깨어있는..

봄날은간다 2022.01.08

교행(交行)

조치원이나 대전역사 지나친 어디쯤 상하행 밤열차가 교행하는 순간 네 눈동자에 침전돼 있던 고요의 밑면을 훑고 가는 서느런 날개바람 같은 것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느 세계의 새벽과 네가 놓쳐버린 풍경들이 마른 그림자로 찍혀 있는 두 줄의 필름 흐린 잔상들을 재빨리 빛의 얼굴로 바꿔 읽는 네 눈 속 깊은 어둠 실선의 선로 사이를 높이 흐르는 가상의 선로가 따로 있어 보이지 않는 무한의 표면을 끝내 인화되지 못한 빛이 젖은 날개로 스쳐가고 있다 - 류인서, '교행(交行)' 전문(시집 『그는 늘 왼쪽에 앉는다』 수록) * 이 시를 읽고 있으니, 밤기차를 타고 가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아마도 겨울이었을 것이다. 나는 질이 나쁜 외투를 입고 목의 옷깃을 잔뜩 끌어올린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드문드..

질투는나의힘 2022.01.07

이소라 - Tears

* 퇴근길에 본 밤하늘에 눈썹 모양의 달이 떠 있었다. 저렇게 날렵하고 날카로운 달을 본 적이 있던가? 손을 대면 베일 것만 같은. 사진을 찍고 싶었으나, 운전 중이었으므로 그냥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달을 향해 운전을 했고, 달은 줄곧 내가 가는 길을 비춰주었다. 차가운 밤하늘에 걸려 있는 눈썹달을 보고 있으니, 문득 이소라의 6집 앨범인 이 생각났다. 어쩌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리라. 한때 무척 많이 들었었는데 지금껏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라 그런가, 이소라의 목소리가 더욱 귀에 감긴다.

오후4시의희망 2022.01.04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2008.

그녀가 이렇게 거울 앞에 앉은 것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으나, 정작 깨달은 것은 사랑스러웠던 자신의 모습을 공격해 시나브로 죽여 온 것이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사실이었다.(9쪽) * "당신 여자 친구들은 모두 바지만 입나 보군요." "저는 그런 사람 없는데요." 그가 말했다. "여자 친구가 없다고요?" "그렇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됐죠?" "모르겠어요." 그녀는 그를 놀려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소심함과 대담함, 때로는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진지함과 즉흥성의 결합이 유쾌하게 느껴졌다. 저렇게 신비로운 태도와 나직한 어조로 "모르겠어요."라고 하다니.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든 것에 대해 그렇게 전반적으로 무관심해진 게 언제부터인 것 같아요?" "그건 오히려..

고요의 바다

* 일단 제목이 끌렸다. 배우들도 괜찮아 보였다. 예고편을 보니 내가 많이 보지 않는 장르의 드라마였지만 그래도 꽤 재미있을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SF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넷플릭스에서 만들었으니 제작비가 부족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특수효과랄지, 비주얼적인 면에 대해서도 믿음이 있었다. 누군가는 제목처럼 너무 '고요'한 거 아니냐고 했는데, 나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빠른 전개를 바라는 사람들은 다소 느릿하다 느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가 달이고 그곳에 세워진 연구기지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배경 자체에서 오는 고립되고 정적인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고요하지만 고독하고, 어떤 기대감과 불길함을 동시에 품고..

봄날은간다 2022.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