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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아니면, 사랑하지 않으면

아래는 국민서평프로젝트라는 이벤트에 응모하기 위해 썼던 글의 원본이다. 그러니까 분량에 맞춰 내용을 잘라내기 전의 글이다. 크게 다를 것이 없지만, 그래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더 있는 거 같아서, 저장해둔다는 의미로 여기 올려놓는다. * 언제나 그렇듯 통증은 나를 고립시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 속에 나는 갇힌다. 통증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간으로부터,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온다.(한강, 120~121쪽) * 아픔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에 대해서. 그 순간들은 마치 이 소설을 통해 전이되어 점차 증폭되는 듯 느껴졌으므로. 이 소설을 읽기 전부터 몸에 약간의..

흔해빠진독서 2021.12.06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이 소설을 읽기 전부터 몸에 약간의 통증이 감지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목이 뻐근한 것뿐이라고, 늘 그랬듯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목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었습니다. 목이 아프니 어깨도 아프고, 허리까지 아픈거 같아서 책 읽기를 잠시 중단할까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강의 소설이 늘 그랬듯 이번 소설도 자꾸만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또한 주인공 경하와 인선이 느끼는 고통이 마치 내게 전이된 것 같은 느낌에 시시각각 사로잡혀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어요. 내가 현재 느끼고 있는 이 몸의 고통쯤은 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5월 광주에 이어 제주 4·3 사건이라는 소재의 무게를 한강..

흔해빠진독서 2021.12.03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감옥

질투란, 쓰쿠루가 꿈속에서 이해한 바로는, 세상에서 가장 절망적인 감옥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죄인이 스스로를 가둔 감옥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힘으로 제압하여 집어넣은 것이 아니다. 스스로 거기에 들어가 안에서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를 철창 바깥으로 던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가 그곳에 유폐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물론 나가려고 자기가 결심만 한다면 거기서 나올 수 있다. 감옥은 그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그러나 그런 결심이 서지 않는다. 그의 마음은 돌벽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그것이야말로 질투의 본질인 것이다.(무라카미 하루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중에서) * '그의 마음은 돌벽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나가려고 결심만 한다면 거..

어느푸른저녁 2021.12.01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33쪽) * 이상하지, 눈은.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인선이 말했다. 어떻게 하늘에서 저런 게 내려오지.(55쪽) * 누군가를 오래 만나다보면 어떤 순간에 말을 아껴야 하는지 어렴풋이 배우게 된다.(75쪽) * 어떤 기쁨과 상대의 호의에도 마음을 놓지 않으며, 다음 순간 끔찍한 불운이 닥친다 해도 감당할 각오가 몸에 밴 듯한, 오래 고통에 단련된 사람들이 특유하게 갖는 침통한 침착성으로.(99쪽) * 언제나 그렇듯 통증은 나를 고립시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

Feeling good

* 이 노래를 음악 프로그램이나 라디오 혹은 광고의 배경음악으로 종종 들었던 것 같다. 남자의 음성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마이클 부블레였던가? 아니면 다른 재즈 가수였을까? 아무튼 우연찮게 이 노래를 레디시(Ledisi)라는 가수의 음성으로 듣게 되었다. 파워풀하고 기교 넘치는 가창력이 이 노래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수록된 앨범의 제목이 다. 여기서 Nina가 니나 시몬(Nina Simone)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니나 시몬이 부른 을 찾아서 들어 보았다. 이렇게나 다를수가! 니나 시몬은 니나 시몬만이 표현할 수 있는 감성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 그래서 이 노래의 원곡은 니나 시몬의 것인가? 생각했는데, 니나 시몬의 위키백과를 보니 원곡자가 줄리 런던(Julie ..

오후4시의희망 2021.11.26

아무런 말도, 아무런 약속도 없이

그래도 어떤 인간들은 결국 헤어지지. 누가 꼭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각자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도 해. 서로 고유한 존재 방식과 중력 때문에. 안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날 수 없는 거야. 맹렬한 속도로 지구를 비껴가는 행성처럼. 수학적 원리에 의해 어마어마한 잠재적 사건 두 개가 스치는 거지. 웅장하고 고유하게 휙. 어느 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하고 빠른 속도로 휙. 그렇지만 각자 내부에 무언가가 타서 없어졌다는 건 알아. 스쳤지만 탄 거야. 스치느라고. 부딪쳤으면 부서졌을 텐데. 지나치면서 연소된 거지. 어른이란 몸에 그런 그을음이 많은 사람인지도 모르겠구나. 그 검댕이 자기 내부에 자신만이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암호를 남긴. 상대가 한 말이 아..

흔해빠진독서 2021.11.23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 나는 꿈을 꾼다. 내 꿈속에는 당신도 함께 있다. 우리는 사슴이다. 당신의 꿈과 내 꿈은 이어져 있다. 내 꿈속에 당신이 들어온 것이 아니고, 당신의 꿈속에 내가 들어간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꿈속에서 서로 만난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본다. 하지만 꿈을 깨고 난 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꿈속에서 사슴이었던 우리들은 현실에서는 인간인 것이다. 하지만 이내 무언가에 이끌리듯 서로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하지만 꿈속에서처럼 우리들의 만남이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끝내 서로를 알아본다.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기적처럼. 우리들의 꿈은 그렇게 이어진다. 내가 너의, 네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이 아닌. 우리는 그렇게 서로 같은 꿈을 꾼다. * 아름답고 독특한 사랑 이야기다..

봄날은간다 2021.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