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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人, 학교가는 길, 차다

우연히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KBS1에서 하는 다큐를 보았다. 제목은 였다. 2014년에 KBS 파노라마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이미 방영된 다큐라는 것을, 보고 나서야 알았다. 인도의 히말라야 깊숙이 숨겨진 잔스카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여정을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해발 3,800미터 고지대에 사는 잔스카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학교가 있는 라다크의 레(Leh)까지 10일 정도 걸리는 거리를 아이와 함께 걸어서 간다. 10일이라는, 날짜로 헤아려야만 하는 그 거리감도 아찔했지만, 학교까지 가기 위해서는 히말라야의 얼어붙은 잔스카 강을 따라 걸어서 가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학교에 보내려는 자식을 둔 아버지들은 저마다 자신의 몸보다 어쩌면 더 무거울지도..

어느푸른저녁 2022.02.17

어른의 시절

열 살 때는 스무 살이 어른인 줄 알았고, 스무 살 때는 서른 살이 어른인 줄 알았으며, 서른 살 때는 마흔 살이 어른이겠다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와 같은 생각은 너무 순진하고 안일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어른이 자기긍정과 타자에 대한 전폭적인 이해를 완성한 존재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에게 어른의 시절은 없는 듯하다. 불안의 정도, 불안의 깊이가 다를 뿐이고, 사람들은 모두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어느 순간 죽음과 직면할 뿐이다.(김도언, 『불안의 황홀』 중에서) * 늘 어른에 대해서 생각했다. 내가 어른이 되면 어떨까. 내가 스무 살이 되면, 서른 살이 되면 어떨까? 어렸을 때는 마흔 이후의 삶을 생각하지 못했다. 서른이 가까스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어른의 나이였다.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

어느푸른저녁 2022.02.14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달걀과 닭》, 봄날의책, 2019.

우리는 종종 서로를 알아본다. 어떤 특정한 응시의 방식, 악수를 하는 특별한 모습에서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제 변장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비록 말을 나누지는 않지만 거짓말도 하지 않으며, 비록 진실을 말하지는 않지만 가식으로 꾸밀 필요도 없다. 사랑은, 좀 더 많은 관련이 허락되는 일이다. 사랑을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은 나머지 모든 것에 대한 거대한 환멸이기 때문이다. 환상의 상실을 견뎌낼 사람은 거의 없다. 반면에 사랑이 삶을 풍요롭게 해주리라는 믿음을 갖고, 자발적으로 사랑에 뛰어드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이다. 사랑은 궁극의 가난이다. 사랑은 갖지 못함이다. 게다가 사랑은, 사랑이라고 여겨오던 것에 대한 환멸이다. 사랑은 상이..

레베카

* 넷플릭스에서 를 보았다. 뮤지컬로 알고 있던 작품을, 뮤지컬을 보기 전에 영화로 접했다. 소설이 원작이라고 하는데 물론 소설도 읽지 못했다. 유튜브를 통해서 많이 들었던 뮤지컬 넘버들이 아닌, 순수한 영화의 레베카는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다. 물론 뮤지컬과 영화는 다르므로 단순 비교하기는 곤란하겠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가장 궁금한 건 레베카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였지만.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인 '레베카'는 이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단지 끊임없이 호명되며, 다른 인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보이지 않는 존재로써 기능한다. 그녀와 얽힌 사건의 실마리를 푸는 것이 이 영화의 묘미인 것이다. 그 묘미를 제대로 살렸는가에 대해서는 좀 회의적이다. 미스터리 스릴러이긴 하지만 강렬한 서스펜스가 느..

봄날은간다 2022.02.11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출장차 경주에 가게 되었는데, 시간이 남아 황리단길을 걸었다. 황리단길은 이전에도 몇 번 온 적이 있어서 그리 낯설지 않았다. 거기, 작은 서점에서 시집과 소설책을 산 기억이 났다. 오랜만에 간 그곳엔 여전히 젊은 사람들로 활기에 차 있었다. 거리를 걸으면서 보니, 식당과 카페를 제외하고 타로나 점을 봐주는 가게가 생각보다 많았다. 사람이 직접 점을 봐주는 가게도 있었고, 아이들 뽑기처럼 돈을 넣으면 띠별 혹은 별자리별로 운세를 뽑을 수 있는 무인 자판기도 있었다. 유독 많은 사람들이 서 있던 무인 운세 자판기가 생각난다. 주요 고객은 아무래도 젊은 연인들인 것 같았다. 사람들은 돈을 넣고 자신의(?) 운세를 뽑는다. 물론 재미로 하는 놀이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운 혹은 미래가 궁금한 사람들이..

어느푸른저녁 2022.02.09

우리 잘못이 있다면 처음부터 결함투성이로 태어난 것 뿐이란 걸

* 요즘 아파트에 부쩍 사다리차가 자주 보인다. 이사를 오는 건지 가는 건지 궁금해서 잠시 바라본다. 하지만 한 번 올라갔거나 내려온 사다리차의 받침대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늘 이사를 오는지 가는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못한 채 시선을 거둔다. 왜 그런 것에 흥미를 느끼는가? 이삿짐에 실린 누군가의 삶이, 그 사적인 은밀함이 궁금하기 때문일까? 나와 한 번도 만날 일이 없고, 스치는 일조차 없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그저 사다리차의 저 거대한, 공룡과도 같은 외형에 끌리는 것일까? 쓸데없는 의문과 공상이 꼬리를 무는 일요일 오후. * 설 연휴 동안 가족들을 만나느라 혼자 있는 시간이 없었다. 비로소 오늘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며칠 가족들이 다녀간 집은 꽤 어질러져 있었다. 일어나서 밀린 ..

어느푸른저녁 2022.02.06

나는 혼자 너무나 조심스러웠고, 그곳의 모든 것들은 아득하기만 했으므로

* 어떤 순간들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바다를 본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또 바다를 보게 되었다. 우리들은 조금 늦게 출발한 덕분에 일몰을 볼 수 있었다. 바닷가에서 맞이하는 일몰은 설명하기 힘든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바라본 일몰의 바다는 마치 투명하고 얇은 얼음막으로 감싸인 듯 느껴졌다. 손을 뻗으면 거기 살얼음이 만져질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투명하고 티 없는 바다 위에 갈매기 한 마리만이 유유하게 헤엄을 치고 있었다. 순간 비현실적인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분명 그곳에 존재했으나, 풍경 속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투명한 막을 찢을 용기가 내겐 없었다. 나는 혼자 너무나 조심스러웠고, 그곳의 모든 것들은 아득하기만 했으므..

어느푸른저녁 2022.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