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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된 것들의 잔재

나의 사라짐이 이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슬픔을 가져다주지 않고, 그 어느 누구의 마음에도 공백을 만들지 못한다 해도, 혹은 그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조차 못한다 해도, 그것은 나 자신의 문제다. 분명 나는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으며 살아왔다. 심지어 더 이상 잃어버릴 만한 것이 나 자신 이외에는 이제 거의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내 안에는 상실된 것들의 잔재가 앙금처럼 남아 있어, 그것이 나를 여태껏 버텨오게 해 준 것이다.(무라카미 하루키, 중에서) * 나를 여태껏 버티게 해 준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지금까지 나를 살게 한 걸까. 나 역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잃으며 살아오지 않았나. 내 안에 상실된 것들의 잔재가 앙금처럼 남아서, 그것이 나를 여태껏 버티게 해 준 것일..

어느푸른저녁 2022.01.01

과거의 어느 사소한 순간이

아무런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과거의 어느 사소한 순간이 생각날 때가 있다. 과거는 주로 미래의 한순간과 강하게 연결되는데, 예를 들자면 죽음이 떠오르면서 동시에 과거의 어느 한 장면이 자연스럽게, 그러나 아주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듯이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모습을 드러낸 과거의 사건은 이미 망각되어버린 것이거나 혹은 너무나 사소하고 무의미해서 미래의 어떤 순간과는 전혀 아무런 연결고리를 갖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존재하듯이 보인다. 그 과거의 사건들은 인생의 비밀을 미리 알려주는 암시였을까. 그것이 암시였기 때문에 어느 날 우리의 의식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이 무심코 갈망한 우연이기 때문에 미래의 어느 날 그것은 암시가 되는 것이리라.(배수아, 단편 중에서..

어느푸른저녁 2021.12.24

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

* 영화관에 가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숙직을 해서 당직 휴무날이었다. 길을 걷고 있는데 깜짝 놀랐다.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가 갑자기 내 옆으로 휙 지나갔다. 가게 앞에 세워놓은 설치물들이 다 넘어져 있거나 길거리에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다리가 휘청거렸다. 눈물과 콧물이 절로 났다. 예상치 못하게 맞는 세찬 바람에 어리둥절해하며 빠른 걸음으로 영화관으로 향했다. 건물 안에 들어서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코로나 시국인데다 날씨마저 나빴지만 역시 영화가 인기가 있긴 한가 보았다.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하긴,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마블의 스파이더맨 영화가 아니던가. 나 역시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이니까. 영화관에 입장하기 위해 스마트폰 어플로 예매한 ..

봄날은간다 2021.12.18

칼과 칸나꽃

너는 칼자루를 쥐었고 그래 나는 재빨리 목을 들이민다 칼자루를 쥔 것은 내가 아닌 너이므로 휘두르는 칼날을 바라봐야 하는 것은 네가 아닌 나이므로 너와 나 이야기의 끝장에 마침 막 지고 있는 칸나꽃이 있다 칸나꽃이 칸나꽃임을 이기기 위해 칸나꽃으로 지고 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슬퍼하자 실컷 첫날은 슬프고 둘째 날도 슬프고 셋째 날 또한 슬플 테지만 슬픔의 첫째 날이 슬픔의 둘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둘째 날이 슬픔의 셋째 날에게 가 무너지고 슬픔의 셋째 날이 다시 쓰러지는 걸 슬픔의 넷째 날이 되어 바라보자 상갓집의 국숫발은 불어터지고 화투장의 사슴은 뛴다 울던 사람은 통곡을 멈추고 국숫발을 빤다 오래가지 못하는 슬픔을 위하여 끝까지 쓰러지자 슬픔이 칸나꽃에게로 가 무너지는 걸 바라보자 - 최정례,..

질투는나의힘 2021.12.15

하나의 세계를 건너온 사과잼과 같이

* 원래부터 집에 있는 것을 좋아하지만, 요즘 들어 더욱 집 밖에 나가지 않게 된다. 예전에는 그나마 주말에 어디든 나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코로나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아예 나가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집에만 있어도 시간이 너무 잘 가서 아까울 지경이다. * 어제는 된장찌개를 끓이기 위해 양파를 썰다가 그만 왼손 가운데 손가락을 베고 말았다. 다행히 깊이 벤 것은 아니었지만 피를 보니 순간적으로 몸이 경직되었다. 다른데 정신이 가 있었던 것일까? 지혈을 하고 밴드를 발랐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지만 참을만했다. 된장찌개 말고 다른 반찬을 몇 개 더 하려고 했었는데 하지 못했다. 아주 조금의 상처인데도 온몸이, 온 정신이 그곳으로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상처란, 아픔..

어느푸른저녁 2021.12.13

Diana Krall - Autumn In New York

* 다이애나 크롤의 에스프레소 같은 음색도 음색이지만, 영상 속 흑백의 거대 도시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내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를 보고 있으니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 느껴진다. 그 꿈은 흑백 영화처럼 아련하기도 하지만 때로 섬뜩하기도 하다. 마치 저 높은 건물들이 그곳의 주인인 것만 같아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저 속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겠지. 치열하게 혹은 호화롭게. 멀리서 바라본 풍경은 노래처럼 그저 아름답기만 한데.

오후4시의희망 2021.12.11

가시 돋친 말

사람이 다 제각각이라지만, 유독 가시가 돋친 사람이 있다. 그에게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려 하면 가시에 찔려 내가 상처 입고 만다. 내가 보인 호의가 그에게는 위선처럼 느껴졌던 것일까? 나는 그저 일상적인 인사 혹은 가벼운 안부 정도의 말을 한 것뿐인데 그조차 그에게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일까?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데. 어쩌다 그와 대화를 하게 되면, 마치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고, 그는 또 이유 없이 화가 나 있는 것만 같으니. 내가 무심히 던진 안부 인사가 날카롭고 공격적인 말들로 되돌아온다. 나는 그가 왜 꼭 그렇게 말을 해야 하는지, 왜 꼭 그렇게 반응을 해야 하는지 늘 의아하다.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 사람들에게 건네는 말들, 사람들을 보는 눈빛에 수많은 가시가 ..

어느푸른저녁 2021.12.08

문자가 왔다

문자가 왔다. 인터넷서점인 예스24와 문화일보가 주관하는 국민서평프로젝트에 참여하라는 내용이었다. 아마도 내가 얼마 전 예스24를 통해 한강의 를 구매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설이 바로 '이달의 책'에 선정되었고, 그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이벤트였기 때문이다. 무슨 문학 공모전 같은 것은 일정한 분량을 기준으로 정하고 있으므로, 반드시 그에 맞춰서 써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다. 이번 서평프로젝트도 그러했다. 정해진 분량대로 글을 쓰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처음에는 그 분량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일단 써놓고 보자 생각했다. 쓰고 보니 생각보다 길어졌다. 분량이 짧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무엇을 덜어내야 할지 난감했다. 쓴 글을 이리저리 잘라내고 다듬어서 분량에 맞춰..

어느푸른저녁 2021.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