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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서글픈 것인지

가끔 생각해. 혈육이란 얼마나 이상한 것인지. 얼마나 이상한 방식으로 서글픈 것인지.(한강, 『희랍어 시간』 중에서) * 설 연휴가 지나갔다. 연차를 내고 모레까지 쉬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내일 출근을 해야 하니 오늘이 설 연휴의 마지막 날인 셈이다. 저번 주 토요일부터 오늘까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5일간의 연휴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아니, 많은 일이라기보다는 좀 많이 속상하고 슬픈 일들이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헤어 나오지 못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결국 슬픔에서 어떻게든 헤어 나오고 싶어서, 내 하나뿐인 동생을 어떻게든 이해해보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오늘 아침 동생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어제까지 아무 일 없..

어느푸른저녁 2022.02.03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평생을 지하에서 근무한 인간에겐 지하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 따위 소릴 해선 안 되는 거라구.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야. 아무도 너처럼 살지 않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순 없어. 그딴 소릴 지껄이는 순간부터 인생은 맛이 가는 거라구.(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에서) *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 요즘 그 생각을 많이 한다. 세계라는 건 결국 개인의 경험치라는 것.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라는 것. 그래서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따위의 소리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 하지만 나는 늘 고작 나라는 ..

어느푸른저녁 2022.01.28

Mahler - Piano Quartet in A Minor

* 문득 이 음악이 생각났다. 영화 를 통해서 처음 들었다. 나는 이 음악을 들으면 영화가 생각나고, 영화를 생각하면 이 음악이 떠오른다. 영화 때문에 음악을 듣고, 음악 때문에 영화를 보게 된다. 영화가 음악을, 음악이 영화를 서로 생각나게 한다. 영화 속 누군가 묻는다. '브람스인가?' 다른 누군가 대답한다. '말러' 그들이 누구였는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대화 중에 들려오던 이 음악만이 오롯이 남아있다. 음악 때문에 영화가, 영화 때문에 음악이 더욱 특별해지는 순간. 그런 식으로 어떤 음악은 내 가슴에 선명히 각인된다.

오후4시의희망 2022.01.27

잃어버린 볼펜을 찾아서

그는 또 볼펜이 없어졌다고 했다. 잃어버린 게 아니라 없어졌다고 말했다. 분명히 여기 놔둔 거 같은데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네. 그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엉뚱하게도 이런 생각을 했다. 이 세상엔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모르는 어딘가에 사라진 볼펜들의 세계가 있다. 볼펜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떤 경로를 통해 그들만의 세계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멀쩡히 잘 쓰던 볼펜이 어느 순간 사라진다. 우리는 그걸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여기저기 들고 다니다가 어딘가 놔두고 왔던지 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딘가에 빠뜨렸을 거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부주의한 성격을 탓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사라진 볼펜들은 볼펜들의 세계에 존재하고, 우리가..

어느푸른저녁 2022.01.26

닿을 수 있는 무한

* 금요일에 사무실에서 직장 동료가 내게 물었다. "주말에 뭐 할 계획이세요?" "아... 아마도 바다에... 가게 될 거 같아요." 동료는 갑자기 푹,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 "아, 죄송해요. 말씀이 웃겨서 그런 게 아니라, 바다에 간다는 말씀을 너무나 진지하게 하셔서 순간적으로 웃음이 났어요." 동료의 말에 내가 너무 진지하게 대답을 했나, 생각했다. 바다만 떠올리면 자동적으로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내 가슴속 진지 버튼이 작동하는지도 몰랐다. 바다만 생각하면 괜스레 감상에 빠지고 쓸데없이 심각해지는. 오래전,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학교 수업을 빼먹고 소위 땡땡이를 치던 날이 있었다.(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었는데, 왜 그리 수업을 꼬박꼬박 들었던 것인지 지금 생각하면 좀..

어느푸른저녁 2022.01.23

삼거리 매표소

며칠 전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여사장님께 인사를 하는데 낯이 익었다. "안녕하세요?" "아..." 나는 사장님의 '아...'라는 반응에 의아해하며 자리에 앉아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고 밥을 먹는 중에도 계속 어디서 봤는지 생각했지만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히 예전에 본 적이 있거나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사장님도 나를 분명 아는 눈치인데, 어디서 봤지? 사장님께 물어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밥을 먹었다. "아주 옛날에 본 적이 있는데, 기억이 안나지요?" 밥을 절반 정도 먹었을 때쯤, 사장님이 우리 옆 테이블에 와서 앉으며 그렇게 물었다. 나는 안 그래도 궁금했다고, 어디서 뵌 것 같은데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고, 혹시 여기 말고 다른 식당을 하셨냐고..

어느푸른저녁 2022.01.20

나는 먼저 이 말을 했어야 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사람이 받을 상처에 둔감해진다.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건넨 한마디 말에 그가 말한다. "너희는 너희들 생각만 하는구나."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언젠가 한강의 를 읽고 이런 문장을 썼었다.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얼마나 가 닿을 수 있나, 사랑이 아니면,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바랐다. 나는 너무도 성급하게 모든 것들을 판단하고 결정지었다. 마치 나 자신이 전지전능한 힘을 가진 것처럼. 그렇게 말하면 그렇게 되는 것처럼.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나는 나 스스로의 역량을 너무나도 과대평가했다. 그런 말은 그렇게 쉽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먼저 이 말을 했어야 했다. "타인의 고통에 가 닿지 않아도, 우리는 타인의 마음에, 그 마음 언저리에라도 가..

어느푸른저녁 2022.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