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7

조해진, 《빛의 호위》, 창비, 2017.

그녀의 이야기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평소에는 장롱 뒤나 책상 서랍 속, 아니면 빈 병 속처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얄팍하게 접혀 있던 빛 무더기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일제히 퍼져나와 피사체를 감싸주는 그 짧은 순간에 대해서라면,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다른 세계를 잠시 다녀오는 것 같은 그 황홀함에 대해서라면, 나는 이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권은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악기상점의 쇼윈도우에 반사되는 햇빛이 오직 그녀만을 비추고 있었다.(32쪽, '빛의 호위' 중에서) * 높은 곳에서 새벽의 M시를 내려다본다면, 형광등의 창백한 빛에 둘러싸인 편의점은 네모난 모양의 부표처럼 보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하곤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안전하면서도 풍요로운 영역이 ..

김명인, 《내면 산책자의 시간》, 돌베개, 2012.

나에게는, 말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와 상호부조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런 관계의 얽힘을 기피하는 이중성이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불편하고 힘들면 손쉽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이런 식의 '신세짐' 자체가 부담스러운 것보다는 나의 이러한 얄팍한 이중성 앞에 직면하는 일이 더 힘든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라는 '선한' 이념과, '신세'라는 말에서 풍기는 어딘가 '편법적인' 분위기 사이의 분열. 또 기꺼이 신세를 지는 뻔뻔함과, 얽히는 것을 기피하는 개인주의 사이의 분열. 이런 것들이 어정쩡하게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결국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하는 뭔가 몰의식적인 상태로 빠지는 것이 무엇보다 힘겨운 것이다. 자립도 연대도 아닌, 고독도 의존..

코맥 매카시, 《로드》, 문학동네, 2008.

네가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들은 거기 영원히 남는다는 걸 잊지 마. 한번 생각해보렴. 남자가 말했다. 어떤 건 잊어먹지 않나요? 그래. 기억하고 싶은 건 잊고 잊어버리고 싶은 건 기억하지.(17쪽) 전 같으면 들어가지 않았던 숲이 되어버린 집의 잔해를 손으로 헤집고 들어갔다. 지하실의 검은 물에 쓰레기와 녹이 스는 관과 함께 둥둥 떠 있는 시체 한 구. 남자는 천장의 일부가 타버려 하늘을 향해 뻥 뚫린 거실에 서 있었다. 물 때문에 뒤틀린 판자들이 마당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서가의 물 먹은 책들. 남자는 한 권을 꺼내 펼쳤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모든 것이 축축했다. 썩어가고 있었다. 서랍에서 초를 하나 발견했다. 불을 붙일 방법은 없었다. 남자는 초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회색 빛 속으로 걸어나가..

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2009.

블로흐는 문가에서 팔에 수건 한 묶음을 얹고 그 위로 회중전등을 든 아가씨를 보았다. 그가 아는 체를 하기도 전에 그녀는 복도로 나가 버렸다. 그녀는 문에 대고 잠을 깨워 미안하다고 했지만, 블로흐도 동시에 그녀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 복도로 나갔지만, 그녀는 다른 방에 들어가고 없었다. 블로흐는 자기 방으로 다시 돌아와 열쇠를 분명히 두 번 돌려서 문을 잠갔다. 나중에 그는 방 몇 개를 지나 아가씨를 뒤쫓아 가서 자기가 아까 착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수건을 세면대 위에 놓고 있던 아가씨가 "네, 저도 착각했어요."하고 대답했는데, 그녀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복도 끝 계단에 서 있는 버스 운전사를 그와 혼동하고, 그가 이미 방에서 나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