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5

코맥 매카시, 《로드》, 문학동네, 2008.

네가 머릿속에 집어넣은 것들은 거기 영원히 남는다는 걸 잊지 마. 한번 생각해보렴. 남자가 말했다. 어떤 건 잊어먹지 않나요? 그래. 기억하고 싶은 건 잊고 잊어버리고 싶은 건 기억하지.(17쪽) 전 같으면 들어가지 않았던 숲이 되어버린 집의 잔해를 손으로 헤집고 들어갔다. 지하실의 검은 물에 쓰레기와 녹이 스는 관과 함께 둥둥 떠 있는 시체 한 구. 남자는 천장의 일부가 타버려 하늘을 향해 뻥 뚫린 거실에 서 있었다. 물 때문에 뒤틀린 판자들이 마당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서가의 물 먹은 책들. 남자는 한 권을 꺼내 펼쳤다가 다시 집어넣었다. 모든 것이 축축했다. 썩어가고 있었다. 서랍에서 초를 하나 발견했다. 불을 붙일 방법은 없었다. 남자는 초를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회색 빛 속으로 걸어나가..

페터 한트케,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민음사, 2009.

블로흐는 문가에서 팔에 수건 한 묶음을 얹고 그 위로 회중전등을 든 아가씨를 보았다. 그가 아는 체를 하기도 전에 그녀는 복도로 나가 버렸다. 그녀는 문에 대고 잠을 깨워 미안하다고 했지만, 블로흐도 동시에 그녀에게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 복도로 나갔지만, 그녀는 다른 방에 들어가고 없었다. 블로흐는 자기 방으로 다시 돌아와 열쇠를 분명히 두 번 돌려서 문을 잠갔다. 나중에 그는 방 몇 개를 지나 아가씨를 뒤쫓아 가서 자기가 아까 착각을 했다고 설명했다. 수건을 세면대 위에 놓고 있던 아가씨가 "네, 저도 착각했어요."하고 대답했는데, 그녀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복도 끝 계단에 서 있는 버스 운전사를 그와 혼동하고, 그가 이미 방에서 나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