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5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필로소픽, 2014.

나는 내 생애에 단 한 번도 책 한 권을 완전히 다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나의 독서 방식은 고도의 기술로 책장을 넘기는 사람, 즉 읽기보다 책장 넘기기를 더 좋아하는, 그래서 한 쪽을 읽기 전에 아마도 수백 쪽을 뒤적거리는 그런 방법이지요. 그러나 한 쪽을 읽으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아주 철저하게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열정으로 읽습니다. 내가 독자이기보다는 오히려 책장을 넘기는 사람임을 당신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책장 넘기는 것을 읽는 것만큼 좋아합니다. 나는 다 읽지는 않았지만 수백만 번도 더 책장을 넘겼습니다. 그렇지만 책장을 넘길 때에도 항상 읽을 때와 같은 기쁨과 실제적인 정신적 쾌감을 느꼈지요. 책 한 권을 전부 다 읽지만 단 한 쪽도 철저하게 읽지 않는 독자보다는..

신경숙, 《아버지에게 갔었어》, 창비, 2021.

아버지, 나는 부서지고 깨졌어요. 당신 말처럼 나는 별것이나 쓰는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그 별것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해요.(93쪽) * 책을 통해 인간을 알게 되었지. 얼마나 나약하고 또 얼마나 강한지를 말이야. 한없이 선하고 끝간 데 없이 폭력적이지.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고 불행과 대치하며 한생을 살다 간 사람들은 자취를 남기네. 모진 상황들을 견뎌낸, 흔적 말이야. 내가 책을 읽는 일은 그 흔적 찾기였는지도 모르겠어.(322쪽) *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더 깊이 그 생각에 빠져든다. 잊으려고 애쓰면 더욱 잊히지 않듯이. 생각을 하지 말자, 해서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더 생각할 게 없을 때까지 생각을 하는 수밖에 길이 없..

장 그르니에, 《섬》, 민음사, 2020.

전통적인 종교들과 무관하게 성장한 한 젊은 사람에게는, 이 조심스럽고 암시적인 접근이 아마 보다 더 깊이 있는 반성으로 이끄는 유일한 방식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양과 밤과 바다······는 나의 신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향락의 신들이다. 그들은 가득히 채워 준 뒤에는 다 비워 내는 신들이다. 오직 그들과만 더불어 지냈더라면 나는 향락 그 자체에 정신이 팔려 그들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어느 날 그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나의 이 자연신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에게 신비와 성스러움, 인간의 유한성,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해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9쪽, 카뮈의 서문, '섬'에 부쳐서) *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열아홉 살 무렵의 나는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거의 알지 못했고, 당연히 타인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도 기쁨이나 슬픔이 뭔지는 대충 알고 있다고 내 딴에는 생각했었다. 다만 기쁨과 슬픔 사이에 있는 수많은 현상을, 그것들의 위치관계를 아직 잘 분간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종종 나를 몹시 불안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돌베개에', 9~10쪽) *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정신질환이랑 비슷해."('돌베개에', 15쪽) *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

후쿠자와 유키치, 《학문을 권함》, 기파랑, 2011.

속담에 "하늘은 부귀를 사람에게 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한 일에 준 것"이라는 말이 있다. 빈부나 귀천의 차는 하늘이 정해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어떻게 일을 했는가에 따른 것이라는 의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에게 원래 귀천이나 빈부의 차이 같은 것은 없다. 학문을 닦아 세상 이치를 잘 알게 된 사람은 출세하거나 부자가 되고, 그 와 반대로 학문에 힘쓰지 않은 사람은 출세도 못하고 가난하게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21쪽) * 하늘의 도, 사람의 도에 따라 국제적인 교류를 갖고, 바른 도리에 기초해 아프리카 등 후진국 사람들에게도 잘못이 있으면 사과를 하고, 대의를 위해서는 영국이나 미국의 군함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가 치욕을 당했을 때는 국민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목숨을..

윤광준, 《심미안 수업》, 지와인, 2018.

딜레탕트의 어원은 이탈리아어 딜레타레로 '기쁘게 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기쁨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찾는 것이다. 예술 애호가로 살면서 느낀 건,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도 모두 의식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내가 의미를 둔 것만이 나에게 그 미적인 감흥을 허용한다. 명화도 명곡도, 일상의 작은 연필 하나까지도 그렇다.(12쪽) * 감상은 단순히 '본다'는 것을 넘어선다. 우리가 아름다운 것에 끌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어떤 판정을 내리는 것은 쉽게 잊히는 특징이 있다. 그것보다 더 새롭고 대단한 자극을 받으면 그 이전의 기억이 무력해지는 것과 같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일방적 수용이라면, 예술의 아름다움은 자신이 개입된 적극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때문..

배수아 외,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미디어버스, 2020.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와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금에서 그것을 지치지 않고 찾아내는 사람들은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와야 할 것들에 몰두하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이들은 와야 할 것이라 믿는 것들을 이미 연습을 통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어떤 시간들을 뭉쳐지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거는 꼭 지난 시간은 아니에요.(50쪽, 박솔뫼, '매일 산책 연습' 중에서) * 파도는 깊은 물속에서 올라온 줄에 손목이 묶인 수억만 개의 손가락입니다.(92쪽, 김혜순, '해운대 텍사스 퀸콩' 중에서) * 환자가 집안에 있는 건 슬픈 일이고 자기 자신의 삶에 근저당이 잡히는 셈이었다. 죽음이라는 채무자가..

나는 하나의 노래를 가졌다

무대 위에는 나와 그, 그리고 제3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나와 그, 우리 두 사람은 객석에 등을 돌린 채 멀리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나란히 바닥에 요가의 연꽃자세로 앉아있다. 우리의 머리와 등은 꼿꼿하고 양 손은 양 무릎 위에 놓였다. 살짝 가벼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바다 위에는 거대하고 둥근 흰 섬광이 있다. 그것은 예외적인 구름이거나, 공중을 나는 흰 배이거나, 조용하게 정지한 폭발이거나, 비정상적으로 큰 새이거나, 시각적인 불안이거나, 지금 막 열린 어떤 미지의 문처럼 보인다. 우리는 정면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를 보지 않으면서 말하고, 그는 내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입을 움직이지 않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의 말은 서로 겹치고 뒤섞이며 구별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