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8

백민석, 《목화밭 엽기전》, 한겨레출판, 2017.

우리 속의 맨드릴 원숭이는, 암수 한 쌍이고 나이도 비슷했다. 그는 그런 둘이, 신방을 차리기는커녕, 암컷이 절대로 수컷 가까이는 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우리가 좁아 한 놈이 바닥을 돌아다니면 한 놈과 저절로 부딪치기 마련이었다. 둘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서 있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암컷은, 수컷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될 때면, 철골 구조물을 타고 우리 꼭대기로 훌쩍 올라가버렸다. 암컷과 수컷 사이에 무슨, 안전거리 규정 같은 것이 있는 듯했다. 안전거리는, 육체를 가진 생물이면 어느 것에나 있는 것이었다. 육체란, 공간이라서 그렇다. 해수 속의 박테리아부터, 사우나탕 휴면실에서 잠잘 자리를 찾는 발가벗은 사내들까지. 그 살아 있는 공간인 육체는 항상, 타생물과의 일정한 거리를 필..

W. G. 제발트, 《자연을 따라. 기초시》, 문학동네, 2017.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번 해보기, 이것이 자연의 유일한 목표다. 발아, 성장, 그리고 번식,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그리고 우리 머리에서 나온 쓰레기 더미에 불과한 기계를 통해서도.(37쪽) * 험악한 사건으로 점철된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알프스산맥의 북쪽 기슭에서, 외면적으로는 파멸의 개념을 모르는 채로 자라났다. 그러나 자주 길에서 넘어져 다친 손에 붕대를 감고 푸크시아 관목 곁 창가에 앉아 몇 시간이고 꼼짝없이 창밖만을 쳐다보고 있을 때 너무 일찍 나를 엄습해온 눈앞에 고요히 떠오르던 소리 없는 재앙의 예감. 그때 창밖의 채마밭에는 빳빳하게 풀 먹인 흰 두건을 쓴 수녀들이 느릿느릿 채마밭 이랑 사이를 움직였는데, 막 깨어난 애벌레들과 겹쳐지며 뇌리에 새겨진 그 광경으로부터 나는 아직도 빠져..

J. D.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2001.

시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합은 무슨. 만약 잘난 놈들 측에 끼어 있게 된다면 그때는 시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측에 끼게 된다면, 잘난 놈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그런 편에 서게 된다면 그때는 어떻게 시합이 되겠는가? 아니, 그런 시합은 있을 수 없다.(19쪽) * 훌륭하다니. 난 정말로 그런 말이 듣기 싫었다. 그건 위선적인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20쪽) * "저기요, 아저씨. 센트럴 파크 남쪽에 오리가 있는 연못 아시죠? 왜 조그만 연못 있잖아요. 그 연못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가는지 혹시 알고 계세요? 좀 엉뚱하기는 하지만 아시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그 사람이 알고 있을 가능성은 백만 분의 일의 확율..

토마스 베른하르트, 《옛 거장들》, 필로소픽, 2014.

나는 내 생애에 단 한 번도 책 한 권을 완전히 다 읽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나의 독서 방식은 고도의 기술로 책장을 넘기는 사람, 즉 읽기보다 책장 넘기기를 더 좋아하는, 그래서 한 쪽을 읽기 전에 아마도 수백 쪽을 뒤적거리는 그런 방법이지요. 그러나 한 쪽을 읽으면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아주 철저하게 그리고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열정으로 읽습니다. 내가 독자이기보다는 오히려 책장을 넘기는 사람임을 당신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책장 넘기는 것을 읽는 것만큼 좋아합니다. 나는 다 읽지는 않았지만 수백만 번도 더 책장을 넘겼습니다. 그렇지만 책장을 넘길 때에도 항상 읽을 때와 같은 기쁨과 실제적인 정신적 쾌감을 느꼈지요. 책 한 권을 전부 다 읽지만 단 한 쪽도 철저하게 읽지 않는 독자보다는..

신경숙, 《아버지에게 갔었어》, 창비, 2021.

아버지, 나는 부서지고 깨졌어요. 당신 말처럼 나는 별것이나 쓰는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그 별것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해요.(93쪽) * 책을 통해 인간을 알게 되었지. 얼마나 나약하고 또 얼마나 강한지를 말이야. 한없이 선하고 끝간 데 없이 폭력적이지.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고 불행과 대치하며 한생을 살다 간 사람들은 자취를 남기네. 모진 상황들을 견뎌낸, 흔적 말이야. 내가 책을 읽는 일은 그 흔적 찾기였는지도 모르겠어.(322쪽) * 무엇이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더 깊이 그 생각에 빠져든다. 잊으려고 애쓰면 더욱 잊히지 않듯이. 생각을 하지 말자, 해서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으려면 더 생각할 게 없을 때까지 생각을 하는 수밖에 길이 없..

장 그르니에, 《섬》, 민음사, 2020.

전통적인 종교들과 무관하게 성장한 한 젊은 사람에게는, 이 조심스럽고 암시적인 접근이 아마 보다 더 깊이 있는 반성으로 이끄는 유일한 방식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양과 밤과 바다······는 나의 신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향락의 신들이다. 그들은 가득히 채워 준 뒤에는 다 비워 내는 신들이다. 오직 그들과만 더불어 지냈더라면 나는 향락 그 자체에 정신이 팔려 그들을 잊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어느 날 그 오만한 마음을 버리고 나의 이 자연신들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나에게 신비와 성스러움, 인간의 유한성,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에 대해 상기시켜 줄 필요가 있었다.(9쪽, 카뮈의 서문, '섬'에 부쳐서) *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

무라카미 하루키, 《일인칭 단수》, 문학동네, 2020.

열아홉 살 무렵의 나는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거의 알지 못했고, 당연히 타인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도 기쁨이나 슬픔이 뭔지는 대충 알고 있다고 내 딴에는 생각했었다. 다만 기쁨과 슬픔 사이에 있는 수많은 현상을, 그것들의 위치관계를 아직 잘 분간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종종 나를 몹시 불안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돌베개에', 9~10쪽) *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보험 적용이 안 되는 정신질환이랑 비슷해."('돌베개에', 15쪽) *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

후쿠자와 유키치, 《학문을 권함》, 기파랑, 2011.

속담에 "하늘은 부귀를 사람에게 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한 일에 준 것"이라는 말이 있다. 빈부나 귀천의 차는 하늘이 정해준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어떻게 일을 했는가에 따른 것이라는 의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에게 원래 귀천이나 빈부의 차이 같은 것은 없다. 학문을 닦아 세상 이치를 잘 알게 된 사람은 출세하거나 부자가 되고, 그 와 반대로 학문에 힘쓰지 않은 사람은 출세도 못하고 가난하게 되어 신분이 낮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21쪽) * 하늘의 도, 사람의 도에 따라 국제적인 교류를 갖고, 바른 도리에 기초해 아프리카 등 후진국 사람들에게도 잘못이 있으면 사과를 하고, 대의를 위해서는 영국이나 미국의 군함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국가가 치욕을 당했을 때는 국민 마지막 한 사람까지 목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