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7

한 마리 양을 가진 목동

(제24회 오늘의 작가상 배수아 리뷰 대회 심사 소감) 좋아하지 않고 특별한 재능도 없기 때문에 어쩌다 요청이 들어와도 항상 거절하는 일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문학작품의 심사이다. 이번 알라딘 리뷰 선정 작업이 그런 ‘심사’에 속한다고 가정한다면, 나로서는 매우 예외적인 일을 한 셈이다. 그리고 분명 예외적인 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즐거웠고, 그 과정 중에 간혹 놀라웠다고 말하고 싶다. 어려움이란 단지 그중의 몇 개를 골라내는 일, 게다가 골라낸 그것들에 순위를 매기는 일이었다. 서점이란 장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기에 책 구입은 항상 온라인 서점에서 하지만, 단 한 번도 서평을 올린 적이 없는 나는,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정성스럽게 『뱀과 물』에 대한 서평을 썼다는 사실..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민음사, 2008.

그녀가 이렇게 거울 앞에 앉은 것은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으나, 정작 깨달은 것은 사랑스러웠던 자신의 모습을 공격해 시나브로 죽여 온 것이 다름 아닌 시간이라는 사실이었다.(9쪽) * "당신 여자 친구들은 모두 바지만 입나 보군요." "저는 그런 사람 없는데요." 그가 말했다. "여자 친구가 없다고요?" "그렇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됐죠?" "모르겠어요." 그녀는 그를 놀려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소심함과 대담함, 때로는 우스꽝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진지함과 즉흥성의 결합이 유쾌하게 느껴졌다. 저렇게 신비로운 태도와 나직한 어조로 "모르겠어요."라고 하다니.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모든 것에 대해 그렇게 전반적으로 무관심해진 게 언제부터인 것 같아요?" "그건 오히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33쪽) * 이상하지, 눈은.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인선이 말했다. 어떻게 하늘에서 저런 게 내려오지.(55쪽) * 누군가를 오래 만나다보면 어떤 순간에 말을 아껴야 하는지 어렴풋이 배우게 된다.(75쪽) * 어떤 기쁨과 상대의 호의에도 마음을 놓지 않으며, 다음 순간 끔찍한 불운이 닥친다 해도 감당할 각오가 몸에 밴 듯한, 오래 고통에 단련된 사람들이 특유하게 갖는 침통한 침착성으로.(99쪽) * 언제나 그렇듯 통증은 나를 고립시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

강원국, 백승권, 박사,《강원국 백승권의 글쓰기 바이블》, CCC, 2020.

말은 잘하는데 글은 못 쓰는 건 글을 많이 안 써봐서 그런 거예요. 또 말은 시간을 주지 않아요. 말은 바로 해야 하는데, 글을 시간을 주죠. 시간을 주니까 어떻게든 잘 써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검열을 하게 되죠. 또 검열하다 보니 글쓰기가 어려워지는 거고요. 또한 글을 쓰러면 형식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게 문법이죠. 말에도 어법이 있지만, 문법이 훨씬 엄격하잖아요? 그래서 좀 어려운 측면이 있지요. 자기 생각을 글쓰기의 어떤 방식 안에 담는 건데... 잘 쓰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말하듯이 쓰면 누구든지 잘 쓸 수 있죠.(19쪽) * 한마디로 착수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일단 시작하는 것. 우리 뇌는 무언가 착수했을 때부터 활성화하기 시작한다고 해요. '작동흥분이론'이라고 있어요.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파블로 네루다,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민음사, 2007.

나는 바란다 봄이 벚나무와 하는 것과 같은 걸 너와 함께 하기를. (33쪽, 「매일 너는 논다」중에서) * 내가 네 침묵으로 말하게 해다오 (34쪽, 「나는 네가 조용한 게 좋다」중에서) * 너는 내 음악의 그물 속에 들여졌다, 내 사랑이여, 그리고 내 음악의 그물은 하늘처럼 넓다. 내 영혼은 네 슬퍼하는 눈의 기슭에서 태어났다. 네 슬퍼하는 눈에서 꿈의 땅은 시작한다. (36쪽, 「해 질 녘 내 하늘에서」중에서) * 저녁이 계류해 있는 부두는 슬프다. 내 삶은 피곤하고 목적도 없이 굶주린다. 나는 내가 갖지 않은 걸 사랑한다. 너는 너무 멀리 있다. 내 혐오는 지루한 황혼 녘과 씨름한다. 그러나 밤은 오고 나에게 노래 부르기 시작한다. (40쪽, 「여기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중에서) * 사랑은 그다지도..

김한민, 《페소아》, 아르테, 2018.

우리에게는 '영향을 선택할 권리', 좋은 영향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 선택의 폭은 늘 우리가 원하는 만큼 넓지 않고, 그 선택권은 전적인 것이 아니라 반드시 타협을 거쳐야 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우리는 태어난 곳에 고정되어 살아가는 식물이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동물이기에, 우리가 받는 영향들을 선택하는데 참여할 수 있고, 이미 참여하고 있다. 환경 결정론자들도 인간이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환경을 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나는 내가 영향받을 사람과 환경을 최대한 능동적으로 택하고 싶었고, 고민과 타협 끝에 포르투갈과 페소아를 선택했다. 다행히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결정하는 것은 영향의 초기인자들일 뿐, 그 결정의 의미와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페소아의 마지..

백민석, 《목화밭 엽기전》, 한겨레출판, 2017.

우리 속의 맨드릴 원숭이는, 암수 한 쌍이고 나이도 비슷했다. 그는 그런 둘이, 신방을 차리기는커녕, 암컷이 절대로 수컷 가까이는 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았다. 우리가 좁아 한 놈이 바닥을 돌아다니면 한 놈과 저절로 부딪치기 마련이었다. 둘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 서 있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암컷은, 수컷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게 될 때면, 철골 구조물을 타고 우리 꼭대기로 훌쩍 올라가버렸다. 암컷과 수컷 사이에 무슨, 안전거리 규정 같은 것이 있는 듯했다. 안전거리는, 육체를 가진 생물이면 어느 것에나 있는 것이었다. 육체란, 공간이라서 그렇다. 해수 속의 박테리아부터, 사우나탕 휴면실에서 잠잘 자리를 찾는 발가벗은 사내들까지. 그 살아 있는 공간인 육체는 항상, 타생물과의 일정한 거리를 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