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7

크리스토프 바타유, 《다다를 수 없는 나라》, 문학동네, 2006.

카트린 수녀는 자신의 생각을 두꺼운 나뭇잎에 적어놓았다. 그녀의 일기는 긴 시와도 같았다. 그 속에서 자신의 새로운 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그려놓은 풍경은 더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심지어 몸이 아플 때에도 저녁이면 모닥불 불빛 아래서 베트남에 관한 이야기들을 계..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27쪽) *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정확히 인식한 책만 정확히 위로할 수 있다.(38쪽) *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

한강 외, 《작별》, 은행나무, 2018.(제1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

지난가을 그 실에 대해 그녀가 처음으로 말했을 때 그는 대답했다. 그걸 사랑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알기로 사랑이란 것은 감정인데, 강렬하게 생겼다가는 사라지고 뜨거워졌는가 싶으면 환멸 속에서 식는 무엇인데, 이 실과 접지의 느낌은 무색무취인 ..

안토니오 로부 안투네스, 《대심문관의 비망록》, 봄날의책, 2016.

살라자르가 아이스크림 케이크와 생크림 케이크와 허브티를 건네주던 내가, 제독과 알고 지내던 내가, 썩은 감자를 썰어 냄비에 넣고, 몇푼의 연금으로 벌레 먹은 사과와 장어 토막을 사면서 행상인의 저울을 의심하게 되리라, 빈 국수상자와 빈 콩봉지와 빈 쌀포장지와 함께 선반에 놓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