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8

윤광준, 《심미안 수업》, 지와인, 2018.

딜레탕트의 어원은 이탈리아어 딜레타레로 '기쁘게 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기쁨은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찾는 것이다. 예술 애호가로 살면서 느낀 건,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도 모두 의식적인 활동이라는 것이다. 내가 의미를 둔 것만이 나에게 그 미적인 감흥을 허용한다. 명화도 명곡도, 일상의 작은 연필 하나까지도 그렇다.(12쪽) * 감상은 단순히 '본다'는 것을 넘어선다. 우리가 아름다운 것에 끌리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어떤 판정을 내리는 것은 쉽게 잊히는 특징이 있다. 그것보다 더 새롭고 대단한 자극을 받으면 그 이전의 기억이 무력해지는 것과 같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일방적 수용이라면, 예술의 아름다움은 자신이 개입된 적극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때문..

배수아 외,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미디어버스, 2020.

현재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 와야 할 것들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지금에서 그것을 지치지 않고 찾아내는 사람들은 이미 미래를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와야 할 것들에 몰두하고 사람들의 얼굴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하는 이들은 와야 할 것이라 믿는 것들을 이미 연습을 통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어떤 시간들을 뭉쳐지고 합해지고 늘어나고 누워있고 미래는 꼭 다음에 일어날 것이 아니고 과거는 꼭 지난 시간은 아니에요.(50쪽, 박솔뫼, '매일 산책 연습' 중에서) * 파도는 깊은 물속에서 올라온 줄에 손목이 묶인 수억만 개의 손가락입니다.(92쪽, 김혜순, '해운대 텍사스 퀸콩' 중에서) * 환자가 집안에 있는 건 슬픈 일이고 자기 자신의 삶에 근저당이 잡히는 셈이었다. 죽음이라는 채무자가..

나는 하나의 노래를 가졌다

무대 위에는 나와 그, 그리고 제3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나와 그, 우리 두 사람은 객석에 등을 돌린 채 멀리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나란히 바닥에 요가의 연꽃자세로 앉아있다. 우리의 머리와 등은 꼿꼿하고 양 손은 양 무릎 위에 놓였다. 살짝 가벼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다. 바다 위에는 거대하고 둥근 흰 섬광이 있다. 그것은 예외적인 구름이거나, 공중을 나는 흰 배이거나, 조용하게 정지한 폭발이거나, 비정상적으로 큰 새이거나, 시각적인 불안이거나, 지금 막 열린 어떤 미지의 문처럼 보인다. 우리는 정면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말하기 시작한다. 나는 그를 보지 않으면서 말하고, 그는 내 말을 들으면서 동시에, 입을 움직이지 않고 말한다. 그렇게 우리의 말은 서로 겹치고 뒤섞이며 구별되지 않는다. ..

무라카미 하루키, 《고양이를 버리다》, 비채, 2020.

사람은 누구나 많든 적든 잊을 수 없는, 그리고 그 실태를 말로는 타인에게 잘 전할 수 없는 무거운 체험이 있고, 그걸 충분히 얘기하지 못한 채 살다가 죽어가는 것이리라.(34~35쪽) * 어쨌거나 아버지의 그 회상은, 군도로 인간을 내려치는 잔인한 광경은, 말할 필요도 없이 내 어린 마음에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하나의 정경으로, 더 나아가 하나의 의사 체험으로. 달리 말하면, 아버지 마음을 오래 짓누르고 있던 것을―현대 용어로 하면 트라우마를― 아들인 내가 부분적으로 계승한 셈이 되리라.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고, 또 역사라는 것도 그렇다. 본질은 '계승'이라는 행위 또는 의식 속에 있다. 그 내용이 아무리 불쾌하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 해도, 사람은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요조, 《아무튼, 떡볶이》, 위고, 2019.

나는 옛날 '미미네 떡볶이'에서 가장 맛있게 먹었던 것을 이제 영원히 먹을 수 없다. '분위기'말이다. 홀로 카페에서 커피나 차를 마시거나, 홀로 책방에서 시집을 고를 때, 혹은 홀로 술집에서 생맥주 혹은 싱글몰트 따위를 홀짝일 때,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분위기' 하나를 같이 먹는다. 그 '분위기'를 먹으면서 간단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이런저런 생각이라는 것을 하거나 혹은 그 어떤 생각도 필사적으로 하지 않으며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그러고 나면 우리는 어찌 됐든 결국 더욱 자신다움으로 단단해진 채 거리로 나오게 된다.(14쪽) * 꽃나무가 주는 향기를 맡는 일은 나에게 간단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꽃나무는 가까이 다가온다고 해서 향을 더 나눠주는 존재들이 아니다. 어떤 때에는 바..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06.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의견, 즉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알게 되겠지만 이러한 견해로는 여성의 진정한 본성과, 픽션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크나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둘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이 두 가지 문제의 결론에 도달해야 할 의무를 회피했고 따라서 나에게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는 셈입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라도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방과 돈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가지게 되었는지 최선을 다해 보여주겠습니다.('자기만의 방', 10~11쪽) * 상상에 있어서 여성은 더없이 중요한 인물이지만, 실제로는 전적으로 하찮은 존재입니다. ..

윌리엄 버로스, 《정키》, 펭귄클래식코리아, 2009.

종종 들리는 질문이 있다. '왜 마약 중독자가 되는가?' 답은 '스스로 중독자가 되려는 사람은 없다.'이다. 하루아침에 잠에서 깨어나 마약중독자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사람은 없다. 정말 중독되려면 하루 두 번씩 적어도 석 달은 마약을 써야 한다. 나는 처음 습관성 중독이 되기까지 거의 반년이 걸렸다. 그때에는 금단증세도 가벼웠다. 중독자가 되려면 1년 가까이 수백 방의 주사를 써야 한다고 말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물론 이런 질문도 있을 수 있다. '애당초 왜 마약을 시작했나? 왜 중독자가 될 만큼 오래 사용했나?' 다른 어디에도 강한 동기가 없으므로 마약 중독자가 된다. 마약이 당연히 이긴다. 나는 호기심에 시작했다. 돈이 있었고, 별생각 없이 주사를 맞으러 다닌 것뿐이다. 결국 중독됐다. 나와 이야기..

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문학동네, 2020.

"이건 마치 항상 기뻐하라고 윽박지르는 기둥서방 앞에 서 있는 억지춘향의 꼴이 아니겠나. 그렇게 억지로 조증의 상태를 만든다고 해서 개조가 이뤄질까? 인간의 실존이란 물과 같은 것이고, 그것은 흐름이라서 인연과 조건에 따라 때로는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며 때로는 호수와 폭포수가 되는 것인데, 그 모두를 하나로 뭉뚱그려 늘 기뻐하라, 벅찬 인간이 되어라, 투쟁하라, 하면 그게 가능할까?" 준은 말을 끊었다가 이번에는 우리말로 돌아왔다. "이런 상황이라면 결국 사람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지. '시바이(연극, 속임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게 개조의 본질이 아닐까 싶어. 시바이를 할 수 있다면 남고, 못한다면 떠나라. 결국 남은 자들은 모두 시바이를 할 수밖에 없을 텐데, 모두가 시바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