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만한지나침 277

황정은,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병신 같은 건 싫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마지막에 병신 같은 걸 남기고 죽는 건 싫다. 걱정이 될 테니까 말이다. 세상에 남을 그 병신 같은 것이.(「양의 미래」, 43쪽) *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계절의 공기가 신선하게 폐를 부풀렸다. 싸늘하고 맑은 날이었다. 덧옷의 성긴 올 사이로 찬바람이 들었는데 햇볕은 따뜻해서 바람만 아니라면 어디 모퉁이에 앉아 있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만 햇볕을 쬐면서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할 뿐. 내가 어렸을 때는…… 하고 그녀는 계속 생각했다. 동네 모퉁이에 그렇게 앉아 있는 노인들을 잘 이해할 수 없었는데. 눈도 부실 텐데 노인네들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데 앉아 있는 걸까, 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그 사람들은..

배수아,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테오리아, 2016.

험윤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만든다. 그가 커피를 만드는 방식은 매우 간단하다. 모든 종류의 커피머신을 싫어하는 그는 극도로 곱게 간 커피 가루를 스푼 가득히 세 번 커다란 잔에 담고 가스불로 펄펄 끓인 뜨거운 물을 조심스럽게 붓는다. 가루가 대부분 잔 바닥에 가라앉을 때까지 오 분 정도 기다린다. 그리고 두어 모금 정도 마신다. 커피는 충분히 진하지만 그 사이 식어 버렸으므로 아주 뜨겁지는 않다. 당연하게도 항상 약간의 커피 입자가 입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입안에 미세한 깔깔함이 항상 남아 있다. 험윤은 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가루가 가라앉기를 헛되이 기다린다. 하지만 검은 진흙처럼 끈끈하고 고운 커피 입자는 완전히 가라앉는 법이 없다. 충분히 무겁지 않은 미세한 입자들 일부는 잔 전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