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발저, 《산책자》, 한겨레출판, 2017. 아침의 꿈과 저녁의 꿈, 빛과 밤, 달, 태양 그리고 별. 낮의 장밋빛 광선과 밤의 희미한 빛. 시와 분. 한 주와 한 해 전체. 얼마나 자주 나는 내 영혼의 은밀한 벗인 달을 올려다보았던가. 별들은 내 다정한 동료들. 창백하고 차가운 안개의 세상으로 황금의 태양빛이 비쳐들 때 나는 얼마나 .. 기억할만한지나침 2017.07.12
황정은, 《아무도 아닌》, 문학동네, 2016. 병신 같은 건 싫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마지막에 병신 같은 걸 남기고 죽는 건 싫다. 걱정이 될 테니까 말이다. 세상에 남을 그 병신 같은 것이.(「양의 미래」, 43쪽) *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 계절의 공기가 신선하게 폐를 부풀렸다. 싸늘하고 맑은 날이었다. 덧옷의 성긴 올 사이로 찬바람이 들었는데 햇볕은 따뜻해서 바람만 아니라면 어디 모퉁이에 앉아 있고 싶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만 햇볕을 쬐면서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할 뿐. 내가 어렸을 때는…… 하고 그녀는 계속 생각했다. 동네 모퉁이에 그렇게 앉아 있는 노인들을 잘 이해할 수 없었는데. 눈도 부실 텐데 노인네들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데 앉아 있는 걸까, 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그 사람들은.. 기억할만한지나침 2017.05.09
론 마라스코 · 브라이언 셔프, 《슬픔의 위안》, 현암사, 2012. 우리는 슬픔에 젖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슬픔은 우리를 적신다. 슬픔은 아무런 경고도 없이 삶에 틈입한다. 그럴 때 우리는 기습 공격을 받은 것처럼 당황한다.(12쪽) * 슬픔에는 절대적인 것이 없다. 쉽게 견딜 비법도 없고, 빠져나갈 구멍도 많지 않다. 슬픔처럼 개인적인 경험을 이.. 기억할만한지나침 2017.04.18
배수아,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테오리아, 2016. 험윤은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만든다. 그가 커피를 만드는 방식은 매우 간단하다. 모든 종류의 커피머신을 싫어하는 그는 극도로 곱게 간 커피 가루를 스푼 가득히 세 번 커다란 잔에 담고 가스불로 펄펄 끓인 뜨거운 물을 조심스럽게 붓는다. 가루가 대부분 잔 바닥에 가라앉을 때까지 오 분 정도 기다린다. 그리고 두어 모금 정도 마신다. 커피는 충분히 진하지만 그 사이 식어 버렸으므로 아주 뜨겁지는 않다. 당연하게도 항상 약간의 커피 입자가 입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입안에 미세한 깔깔함이 항상 남아 있다. 험윤은 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가루가 가라앉기를 헛되이 기다린다. 하지만 검은 진흙처럼 끈끈하고 고운 커피 입자는 완전히 가라앉는 법이 없다. 충분히 무겁지 않은 미세한 입자들 일부는 잔 전체를.. 기억할만한지나침 2017.02.21
정지돈, 《내가 싸우듯이》, 문학과지성사, 2016. 장은 어리석은 질문이야말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질문이라고 믿었다. 어리석은 질문에는 답이 없거나 틀린 답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이로써 질문은 질문이 아닌 의지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동일한 이유로, 나는 그런 질문이 세계를 망쳤다고 생각했는데(그러므로 질문을 가장한 .. 기억할만한지나침 2017.01.22
오스카 와일드, 《심연으로부터》, 문학동네, 2015. 당신한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고통은 우리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야. 고통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살아 있음을 의식하게 해주기 때문이지. 과거의 고통에 대한 기억은 우리에게 꼭 필요해. 그건 우리의 지속적인 정체성에 대한 보증서이자 증거 같은 것이거든. 나 자신과.. 기억할만한지나침 2016.10.23
한강, 《흰》, 난다, 2016. 왜 흰 새가 다른 색의 새와는 다른 감동을 주는 것인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왜 특별히 아름답게, 기품 있게, 때로 거의 신성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그녀는 이따금 흰 새가 날아가는 꿈을 꾼다. 꿈속에서 흰 새는 아주 가까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햇빛에 깃털들을 빛.. 기억할만한지나침 2016.09.14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현대문학, 2016.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소설가란 불필요한 것을 일부러 필요로 하는 인종'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바로 그런 불필요한 면, 멀리 에둘러 가는 점에 진실, 진리가 잔뜩 잠재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어쩐지 강변을 늘어놓는 것 같지만 소설가는 대.. 기억할만한지나침 2016.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