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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나처럼 엄청난 길치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모든 길이 매번 새롭고 낯설게 느껴진다는 것일 게다. 오늘 출장을 갔다가 집으로 오는 길은 정말이지 처음 보는 길이었는데, 익숙한 듯하면서도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그 길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강렬하게. 나는 천천히 차를 몰았다. 도로에는 내 차 외에 차들이 거의 없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는 듯, 간간히 트럭이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을 뿐. 무언가 태우는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감기 때문인가. 운전을 하는 내 몸이 마치 붕 뜬 듯 느껴졌다. 지나치는 모든 풍경들이 아련하게 다가왔다. 갑작스레 든 이 강렬한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설명할 길 없는 이 감정은. 나는 지금 슬픈가? 설레는가? 하지만 무엇 때문에? 배수아가 어느 책..

어느푸른저녁 2023.10.13

본지는 꽤(?) 되었는데 지금까지 잊고 있다가 이제야 이 영화를 봤다는 걸 떠올렸다. 영화에 대해서 길게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재밌고 인상적인 영화였는데 말이다. 일상 속에서 일어날 법한 소재를 가지고 공포심을 유발하는 영화였는데, 내 예상과는 달리 조금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긴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재미가 있었다. 어느 쪽으로든 극단적으로 갈 것이라는 예상은 했으나 그 방향이 현수(이선균)가 아니라 수진(정유미)이었다는 게 조금 의외였달까. 비뚤어진 믿음은 어떤 식으로든 끝장을 보지 않고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했다. 나는 그 사실이 무엇보다 무서웠다. 잊고 지나갈 뻔한 영화였는데 불현듯(어떤 무의식이 작용한 걸까?) 생각이 났다. 이렇게라도 블로그에 ..

봄날은간다 2023.10.08

단상들

* 머리와 몸이, 거대한 바위에 묶인 채 한없이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있는 것만 같다. 무겁고 무겁다. 피로가 이렇듯 물리적인 실체를 가진 것이었던가? 책을 한 글자도 읽을 수가 없다. 도무지 어느 것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선선한 바람과 풀벌레 소리 가득한 9월의 밤도 아무 소용이 없구나. 그런 와중에, 주문하고 나서 잊고 있던 책이 발송되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하루키의 신간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과 배수아가 번역한 엘제 라스커 쉴러의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그 문자가 내게 아주 잠깐의 설렘을 가져다주었으나 그뿐이었다. 나는 어서 내 몸과 화해하기를 원한다.(20230906) * 책 왔다. 진정한 가을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하려니 갑자기 낯이 간지럽다. 그냥 이렇게 말하련다. 책과 함께..

입속의검은잎 2023.10.0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 진은영, 「가족」 전문(『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수록) 추석 연휴가 지나갔다. 이번 추석은 아주 길게도 아주 짧게도 느껴졌다. 생각해 보면 늘 그랬지만, 이번 추석은 유난히 길고도 짧았다. 나는 시월이 되자마자 감기에 걸려 골골거렸다. 나는 모든 것을 잊고 그저 쉬고만 싶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었고, 어쩔 수 없이 연휴 내내, 감기에 걸렸든 그렇지 않든, 내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가족이라는 - 생각해 보면 한없이 이상하기만 한 - 제단에 바쳐야 했다. 누군가는 말하리라. 바치다니, 당신은 양처럼 태워 없어질 희생물인가? 아니, 가족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래, 나도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내..

어느푸른저녁 2023.10.03

단상들

* 펄펄 끓는 늪지에서 상승한 고통스러운 몽상의 제국이 팔월의 도시 위로 둥실 떠올랐다. 사람들의 꿈을 잠식했다. 한여름의 체온보다 더 뜨거운 공기는 투명하고 견고한 총알이 되어 아주 느린 속도로 더운 심장에서 심장으로 관통하며 여행했다.(배수아,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중에서) 뜨거운 여름이면 생각나는 배수아의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팔월의 도시 위로 둥실 떠오르는, 펄펄 끓는 늪지, 고통스러운 몽상의 제국, 잠식당하는 꿈, 견고한 총알이 되어 느린 속도로 더운 심장에서 심장으로 관통하는 뜨거운 공기. 아, 타는듯한!(20230806) * 어느 순간, 과거에 내가 쓴 글을 읽고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쥐구멍으로 숨고만 싶어질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무언가를 쓴다면, 그것은 창피함을..

입속의검은잎 2023.09.16

페노미나

어렸을 때의 강렬한 경험은 오래도록 - 어쩌면 영원히 - 잊히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지문처럼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남는다. 그리하여 그것은 한 사람의 일생을 (어떤 식으로든) 결정짓고 (싫든 좋든) 이끌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 사람의 무엇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원형(原形)이라는 것은 어쩌면 그렇게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 쌓이고 쌓여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라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 실은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쓸데없이 거창하게 한 것 같다. 나는 그저 오래전에 본 영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우연히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서스페리아》의 한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같은 감독의 다른 영..

봄날은간다 2023.09.14

미래의 불가능한 망명을 막연히 그리워하는

여름이 도래하면 나는 슬퍼진다. 원래는 한여름의 작렬하는 태양이 환하게 비치면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위안을 얻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생각하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상태로 생각하고 느끼는 내 감각의 영원히 묻히지 못한 시신들과, 외부에서 거품처럼 부글거리며 넘쳐나는 삶들 간의 대비가 너무도 날카롭다. 이것은 우주라고 알려진 국경 없는 조국에서, 비록 내가 직접 탄압을 받는 건 아니지만 영혼의 비밀스러운 신념이 모욕당하는 그런 폭정 아래 살아가는 느낌이다. 그리하여 나는 서서히, 미래의 불가능한 망명을 막연히 그리워하게 된다.(769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 페소아가 슬퍼한 여름이 이제 가려한다. '영혼의 비밀스러운 신념이 모욕당하는 그런 폭정 ..

불안의서(書) 2023.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