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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들

* 글자가 보이지 않은 사람에게, 내가 쓴 글을 읽어주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다. 마치 내가 쓴 글이 아닌 것만 같은, 낯설고도 어색한 그 낭독의 순간. 미묘한 공기의 떨림과 서서히 밀려오는 어떤 슬픔의 눈으로 나는 그들을 바라본다. 가만히 듣고 있는 내 아버지를 본다.(20231203) * 내 몸 어딘가에 스위치가 있어 켜고 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와 비슷한 구절을 어디선가 읽은 것도 같은데. 일을 할 때는 일만 생각하고 퇴근하고 나서는 일에 대한 생각은 단 1초라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스위치가.(20231204) * 나는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한 말들이 상대방에게는 정반대로 느껴지는 순간에 대해서 생각한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희미해질 무렵, 상대방..

입속의검은잎 2023.12.28

네가 지금 겪는 일들은 모두 지나가는 과정에 있는 것

춥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제 정말 겨울 같다는 말도 뒤따라 나온다. 모든 것들이 새삼스럽다. 2023년의 마지막 달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12월이 되자마자 업무 때문에 계속 바빴지만 지난 이 주 동안이 절정이었다. 처음 하는 일도 아니었는데, 지난 6월보다 더욱 내 신경은 곤두섰고, 그래서 두 배로 피곤했다. 지난 주말엔 휴일도 반납하고 일을 해야 했던 것이다. 피로가 마치 납덩이가 되어 나를 내리누르는 기분이었다. 몇 번이고 확인했으나, 확인하는 횟수만큼 더욱 확신이 들지 않았고, 그래서 불안이 가중되었다. 마치 쓰나미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데, 번개마저 함께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몰아치던 나날들을 보내고 지금은 조금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찜찜한 기분은 사..

어느푸른저녁 2023.12.23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

"그날 밤 티엔은 편지를 썼다. 받을 사람 없었지만 편지의 내용이 아닌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본 것들을 적었다."(이상우, '배와 버스가 지나가고' 중에서 - 배수아 외,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미디어버스, 2020) 우리는 받을 사람이 없더라도 편지를 쓰며, 편지의 내용이 아닌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아 이어지길 바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 편지의 내용이 아니라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길 바라는 그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20210212) *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니 알겠다. 오래전 내가 얼마나 정성스럽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골랐는지, 그리고 카드를 쓰면서 얼마나 설렜는지. 그리고 생각해 냈다. '편지를 쓰고 있는 기억이 남길 바라는..

어느푸른저녁 2023.12.12

단상들

* 우연히 책장을 보는데 데이비드 빈센트의 『낭만적 은둔의 역사』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제목에 이끌려 읽었던 것 같은데, 어떤 내용이었는지 정말 까맣게 생각나지 않는다. 아무리 망각이 내 특기이고, 어치피 모든 것들이 종국에는 잊힐지라도 이건 좀 충격적이랄까. 어쩌면 제목만으로도 충분했던 걸까?(20231102) * 고양이는 있고,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양이는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다.(20231105) * 너는 힘들다고 내게 말했지. 하지만 네 고통을 내가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니. 내 고통이 너에게 전해지지 않듯이. 나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고통스럽다.(20231107) * 이 아이를 어떡하면 좋겠니. 내가 말하자 기다렸다는 듯 쏟아지는 걱정들. 황망한 눈물과 그건 아니라는 단호..

입속의검은잎 2023.11.30

차가운 밤공기로 그린 자화상 속으로

그 순간 나는 차가운 밤공기로 그린 자화상 속으로 발을 들인 것 같았다. - 조지프 브로드스키, 『베네치아의 겨울빛』 중에서 * 가끔(아니 대부분) 나는 내가 읽고 있는 책을 어떻게 구입하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내가 왜 지금 이 책을 읽고 있으며, 책의 무엇이 나를 이끈 것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간혹 책장을 살펴보다가 놀라기도 한다. 내가 언제 이런 책을 구입했지? 하면서. 그것을 처음 선택했을 때의 감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지기 때문이겠지만, 그 사실이 슬프다기보다는 때론 새롭고 낯선 기분을 느끼게도 한다. 마치 배수아의 『작별들 순간들』 속 문장들처럼, 나는 그것을 읽고, 그것을 잊으며, 다시 읽을 뿐인 것과 마찬가지로. 조지프 브로드스키라는 러시아의 시인이 쓴 이..

흔해빠진독서 2023.11.27

조지프 브로드스키, 《베네치아의 겨울빛》, 뮤진트리, 2020.

나는 그곳에서 내가 그 도시에서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맞이하러 나와 주기를 기다렸다. 그 사람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11쪽) * 겨울은 나의 계절이었다.(13쪽) * 행복은 당신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자유로운 상태에 있을 때, 당신이 그것들과 마주친 순간의 감정일 것이다.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자유 상태에 있는 원소들이 무궁무진하다. 그 순간 나는 차가운 밤공기로 그린 자화상 속으로 발을 들인 것 같았다.(16쪽) * 저온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진짜' 아름다움이다.(34쪽) * 병이 아무리 위중하다고 해도, 병만으로는 이 도시에서 지옥의 환영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이 도시에서 악몽의 먹이가 되려면, 당신은 특수한 신경증이 있거나 그에 비견할 죄악을 거듭 지었거나 아니면 둘 다여야 한다.(..

GoGo Penguin - Everything Is Going to Be OK

* 유튜브 알고리즘은 내 취향을 풍성하게 해주는 것일까 아님 어떤 틀 안에 가두는 것일까? 하긴 좋아하는 것들을 신물이 날 정도로 좋아해 본 적도 없구나. 난 늘 고만고만하게만. 어쩌면 유튜브는 자신의 취향을 마음껏 누리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물론 좋은 의미에서). 노란색 배경에 까만 피아노가 눈길을 끌어 클릭했는데, 음악도 좋다. 그나저나 그룹 이름이 재밌다. 고고 펭귄이라니.

오후4시의희망 2023.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