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017

'8월의 크리스마스'와는 상관없는 이야기

한석규와 심은하 주연의 영화 가 생각났다. 그러니까 정확히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정원(한석규 역)이 자신의 아버지에게 비디오테이프 작동법을 알려주는 장면이. 그 장면에서 아들인 정원은 아버지에게 비디오테이프 작동법을 알려주려 하지만 나이 많은 아버지는 잘 알아듣지 못하고 자꾸만 틀리게 말해서 정원이 버럭 화를 내고 만다. 어색해진 그 순간. 서로 말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난감함도 아들의 화도 모두 이해가 되던 순간. 영화는 내내 잔잔했지만 그 이면에는 슬픔이 만져지던. 어쨌든 그 장면이, 아버지와 저녁을 먹고 차까지 마시고 난 뒤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불현듯 떠올랐다. 찻집에서 아버지는 내게 은행 인증서가 만료되어 간다고 문자가 왔으니 갱신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아버지의 핸드폰에 깔린 은행 ..

어느푸른저녁 2024.01.17

단상들

* 누군가 내게 "그럼 당신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나요?"라고 물었다. 그 말을 듣고부터 나는 내가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는지 궁금해졌다. 뭐랄까... 아, 지금부터 나는 스트레스를 풀 거야!라고 작정하고 하는 것은 아니니까... 나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는 걸까? 이도저도 아닌 글을 쓰면서? 이도저도 아닌 말을 중얼거리면서? 아무 책이나 읽으면서?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면서?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내가 이도저도 아닌 사람인 것만 같다. 뭐, 이도저도 아닌 사람도 있는 거겠지만, 세상엔.(20231230) * 텅 빈 날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무것도, 심지어 일기에 써넣을 몇 줄조차도 만들기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언제나 잊어버린다.(메이 사튼, 『혼자 산다는 것』..

입속의검은잎 2024.01.15

당신이 사람에 대해 하는 말

누군가 내게 말했다. "당신이 사람에 대해 하는 말은 믿을 수가 없어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은 사람을 좋게만 말하니까요. 그 사람의 단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안 하죠. 그게 문제라는 거예요. 그게 어떤 이들에게는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거죠." "어떤 문제를 일으킨다는 건가요?" 나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누군가 당신의 말만 듣고 어떤 사람을 믿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만약 당신이 그 사람의 단점에 대해서도 말했다면 상대방은 다시 한번 더 생각을 했겠죠."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참을 생각한 뒤에야 겨우 이렇게 말했다. "그게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저는 되도록이면 그 사람의 장점만을 보려 하는 편이라... 저..

어느푸른저녁 2024.01.06

너와 나 서로 포옹하면, 죽음은 없으리라

우리는 밤으로 화해하기를 원하니 너와 나 서로 포옹하면, 죽음은 없으리라 - 엘제 라스커 쉴러, 중에서(시집, 『우리는 밤과 화해하기 원한다』 수록) * 그러니까 이 시집은 사랑에 관한 뜨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열정에 도취해 있는 것 같기도 한 이 시집을 나는 배수아가 아니었다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시집이 가진 뜨거움을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나와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사람을 보는 듯했다. 그것은 매번 놀라움과 신기함을 안겨주었으나 때로 감당하기 벅찬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집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옮긴이의 말까지 읽고 나서 깨달았다. 내가 느낀 그 벅찬 느낌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옮긴이의 말을 옮겨본다...

흔해빠진독서 2024.01.01

'진짜' 삶을 위하여(메이 사튼, 『혼자 산다는 것』)

몇 주일 만에 처음으로 혼자 여기서, 마침내 다시 나의 "진짜" 삶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다. 그것이 이상한 점이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이 일어난 것인지 캐보고 알아내기 위한 혼자만의 시간이 없는 한, 친구들 그리고 심지어 열렬한 사랑조차도 내 진짜 삶은 아니라는 것이 말이다. 영양분이 되기도 하고 미치게도 만드는 방해받는 시간들이 없다면, 이 삶은 삭막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맛을 완전하게 음미하는 것은 내가 여기 혼자 있고 그리고 이 집과 내가 이전의 대화들을 다시 시작할 때뿐이다.(7쪽, 메이 사튼, 『혼자 산다는 것』, 까치, 1999.) * 맨 첫 장에 실려 있는 저 문장을 읽고 예감했다. 어쩌면 이 문장이 이 책의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흔해빠진독서 2023.12.31

메이 사튼, 《혼자 산다는 것》, 까치, 1999.

몇 주일 만에 처음으로 혼자 여기서, 마침내 다시 나의 "진짜" 삶을 시작하려고 하고 있다. 그것이 이상한 점이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혹은 무엇이 일어난 것인지 캐보고 알아내기 위한 혼자만의 시간이 없는 한, 친구들 그리고 심지어 열렬한 사랑조차도 내 진짜 삶은 아니라는 것이 말이다. 영양분이 되기도 하고 미치게도 만드는 방해받는 시간들이 없다면, 이 삶은 삭막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 맛을 완전하게 음미하는 것은 내가 여기 혼자 있고 그리고 이 집과 내가 이전의 대화들을 다시 시작할 때뿐이다.(7쪽) * 내가 혼자 있을 때, 그 꽃들이 정말로 보인다. 나는 그것들에게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 그것들은 어떤 영혼처럼 느껴진다. 그것들이 없다면, 나는 죽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할까? 얼마간..

단상들

* 글자가 보이지 않은 사람에게, 내가 쓴 글을 읽어주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는다. 마치 내가 쓴 글이 아닌 것만 같은, 낯설고도 어색한 그 낭독의 순간. 미묘한 공기의 떨림과 서서히 밀려오는 어떤 슬픔의 눈으로 나는 그들을 바라본다. 가만히 듣고 있는 내 아버지를 본다.(20231203) * 내 몸 어딘가에 스위치가 있어 켜고 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와 비슷한 구절을 어디선가 읽은 것도 같은데. 일을 할 때는 일만 생각하고 퇴근하고 나서는 일에 대한 생각은 단 1초라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스위치가.(20231204) * 나는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한 말들이 상대방에게는 정반대로 느껴지는 순간에 대해서 생각한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희미해질 무렵, 상대방..

입속의검은잎 2023.12.28

네가 지금 겪는 일들은 모두 지나가는 과정에 있는 것

춥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제 정말 겨울 같다는 말도 뒤따라 나온다. 모든 것들이 새삼스럽다. 2023년의 마지막 달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다. 12월이 되자마자 업무 때문에 계속 바빴지만 지난 이 주 동안이 절정이었다. 처음 하는 일도 아니었는데, 지난 6월보다 더욱 내 신경은 곤두섰고, 그래서 두 배로 피곤했다. 지난 주말엔 휴일도 반납하고 일을 해야 했던 것이다. 피로가 마치 납덩이가 되어 나를 내리누르는 기분이었다. 몇 번이고 확인했으나, 확인하는 횟수만큼 더욱 확신이 들지 않았고, 그래서 불안이 가중되었다. 마치 쓰나미를 온몸으로 맞고 있는데, 번개마저 함께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 몰아치던 나날들을 보내고 지금은 조금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찜찜한 기분은 사..

어느푸른저녁 2023.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