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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희 - 내게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요(Feat. 박지윤)

내게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요 어차피 돌아서면 아닐 마음인 거 다 알아요 모든 게 모든 게 가벼워요. 날 슬프게 해요. 내게 보고 싶다는 말하지 말아요 손꼽아 기다린 숫자들은 다 허상이겠죠 모두가 모두가 쉬운가 봐요. 날 아프게 해요. 흩어질 말들은 다 소용없어요 끝을 알고도 쓸쓸히 반짝일 수는 없는걸요 이토록 미약한 내게 손을 내밀어 줘요 흩어질 말들은 다 소용없어요 쓰여지지 않은 사랑은 지울 수도 없는걸요 이토록 미약한 내게 손을 내밀어 줘요 내게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요 내게 사랑한다는 말 하지 말아요

오후4시의희망 2023.07.30

농담

우연만이 우리에게 어떤 계시로 보여졌다. 필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 기다려왔던 것, 매일 반복되는 것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오로지 우연만이 웅변적이다. 집시들이 커피잔 바닥에서 가루가 그린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이,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에서 * 정지돈의 산문집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에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그 부분을 읽고 며칠 뒤에 밀란 쿤데라가 별세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나는 오래전에 읽은 그의 소설 속 문장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언제 사놓았는지 모를, 아직 읽지 않은 그의 『농담』을 새삼스레 꺼냈다. 이제 정말 『농담』을 읽어야 할 때인가, 생각하며 책의 표지를 물끄러미..

어느푸른저녁 2023.07.24

정지돈,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문학동네, 2021.

얼마 전 한 지인이 트위터에 다음과 같이 올렸다. 되면 한다. 응? 다른 지인은 말을 하다가 실수를 했다. 길이 있는 곳에 뜻이 있다. ······그렇다.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5쪽) * ―절망적인 삶이 재능인가요? ―어떤 경우에는. 그렇다. 어떤 경우에는 망한 인생도 재능이 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는 인생이 망하지 않았는데 망했다고 느낄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망했는데 희망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중 최악은 뭘까요?(29쪽) * 작가가 되는 데 가장 필요한 재능은 착각이다. 문장력이 좋거나 머리가 좋거나 인내심이 있거나 책을 좋아하거나 기타 등등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수 있다, 라는 착각이다. 이건 굉장히 슬픈 지점이다. 만약 작가를 만드는 요인이 남다른 언..

비오는 날 카페에서

끊임없이 비가 온다. 일이 있어 나갔다가 카페에 들렀다. 창밖으로는 마침 비로 인해 불어있는 강이 보였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핸드폰으로는 재난문자가 계속해서 오고 있었고, 폭우로 인한 피해 소식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창 안쪽에서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 있었으나, 창 밖 저 멀리 어딘가에서는 산사태가 나고, 건물이 무너지고, 급류에 휩쓸려 사람들이 실종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지고 말았다. 창 하나를 사이에 둔 그 아득함과 두려움, 투명함과 불투명함, 선명함과 흐림, 안락함과 고통, 침묵과 아비규환. 그것들은 서로 얼마나 멀고 얼마나 가까운가. 창 이쪽에서 황토색의 강물을 바라보며 쓸데없는 생각에 잠겼는..

어느푸른저녁 2023.07.15

저마다의 항로를 갖고 있는 외로운 항해사처럼

높은 곳에서 새벽의 M시를 내려다본다면, 형광등의 창백한 빛에 둘러싸인 편의점은 네모난 모양의 부표처럼 보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하곤 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안전하면서도 풍요로운 영역이 있다는 걸 알리는 부표인 셈이다. 실제로 새벽의 편의점 안에서 바라보는 문밖의 어둠은 물결처럼 일렁이곤 했고, 어둠을 가로질러 담배나 생수를 사러 오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항로를 갖고 있는 외로운 항해사처럼 보일 때가 많았다. - 조해진, '산책자의 행복' 중에서(소설집 《빛의 호위》 수록) * 편의점만 가면 늘 필요한 물건만 빨리 골라서 나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삼각김밥과 음료를 계산한 뒤 물건을 손에 들기도 전에 안녕히 가세요,라는 인사를 들었기 때문일까. '편의점에서 길을 잃다' 같은 제목의 소설이..

어느푸른저녁 2023.07.13

단상들

*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해,라는 말은 얼마나 힘이 없고 무색한가.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겠는데 어떻게 하라는 말인지. 마음을 정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왜냐하면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이 없는데 반드시 원해야 하는 상황이란 얼마나 난감한가.(20230616) * 어떤 이가 서점에 갔다가 배수아의 책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내 생각이 났다고 했다. 나는 무슨 칭찬을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어떤 책을 보고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에 대해서 생각했다.(20230618) *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는 시간들을 지나고 있다. 책도 읽히지 않고, 영화도 시들하고, 사람들과의 만남은 더욱 하기 싫은, 그런 상태. 며칠 야근을 해서 좀 지쳤기 때문일까. 아님 본격..

입속의검은잎 2023.07.13

비타 색빌웨스트, 『모든 열정이 다하고』, 민음사, 2023.

비타 색빌웨스트라는 이름을 버지니아 울프 때문에 알게 되었다. 아니, 그 둘이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나의 비타, 나의 버지니아』라는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알게 되었다는 게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어쨌든 버지니아 울프만 알고 있었던 내게, 울프의 소설 『올랜도』의 실존 인물이었다고 하는 비타를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그의 소설을 찾아서 읽었다. 이 소설은 역자가 말한 것처럼 '남편과 사별하고 자기만의 평온을 찾아 나선 여든여덟 살 노인'의 이야기다. 주인공인 레이디 슬레인은 총독 부인으로서 남부러울 것 없는 명예와 부를 누렸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다. 모든 열정이 다하고 난 뒤에 찾아온 그것을 어떻게 해..

흔해빠진독서 2023.07.02

비타 색빌웨스트, 《모든 열정이 다하고》, 민음사, 2023.

외모란 얼마나 기이한가, 또 얼마나 부당한지. 인간은 죽을 때까지 외모만 보고 자신을 판단하는 타인을 견뎌야 한다.(19쪽) * "···나는 완전히 내 멋대로 살 생각이야. 노년을 만끽하려고 말이다. 손주들은 출입 금지야. 너무 어려. 마흔넷 넘은 애가 하나도 없잖니. 증손주들도 출입 금지다. 그 애들은 더 심각하지. 난 괄괄한 젊은 애들은 질색이야. 무슨 일을 하든 굳이 왜 하는지 이유를 알려고 난리지, 묵묵히 하는 법이 없어. 그리고 그 애들이 아기를 낳아도 데려오지 말라고 해라. 그 어린 것들이 별일 없이 삶의 막바지까지 다다르려면 얼마나 치열하게 발버둥질해야 할지 생각나서 괴로울 테니까. 그런 건 다 잊고 살려고 해. 태어난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운 사람들만 곁에 두고 살고 싶구나.(50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