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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필요도 없고 딱히 이해 못할 것도 없는

그는 책을 읽다가 어떤 문장에서 눈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 문장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을 뺏어간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일생 이해할 필요도 없고 딱히 이해 못할 것도 없는 가족으로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1 그 문장은 소설 속 주인공과 그의 동생과의 관계를 묘사한 말이었는데, 어쩐지 그는 그것이 가족이라는 말의 보편적인 정의처럼 생각되었다. 보편적이지 않다면 적어도 그에게만은, 그의 가족에게만은 정확하게 일치하는 정의 말이다. 그러니까 가족이란, 일생 이해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이해 못할 것도 없는 존재들이라고 그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 가족만 그러한가? 그는 그러한 정의가 꼭 '가족'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뒤이어 했다. 하지만 그는 거..

어느푸른저녁 2015.04.03

불완전한 방식으로 존재하기 위하여, 그리고 불완전한 이 존재를 소유하기 위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다른 존재가 된다는 의미다. 어제 느낀 것처럼 오늘도 똑같이 느낀다면, 그것은 느낌이 불가능해졌다는 의미다. 어제처럼 오늘도 같은 느낌이라면, 그것은 느낀 것이 아니라 어제 느꼈던 것을 오늘 기억해낸 것이며, 어제는 살아 있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은 것의 살아 ..

불안의서(書) 2015.03.26

제프 다이어, 《꼼짝도 하기 싫은 사람들을 위한 요가》, 웅진지식하우스, 2014.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갔다. 거기 카피톨리움의 폐허 위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고대에 관한 책을 쓰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에 분명하게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런 책을 즐겁게 쓸 수 있을 거라는 한때의 희망도 언젠가는 나 자신의 폐허 안에 그대로 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