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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부주의한 사랑』, 문학동네, 2003.

이 소설을 읽고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어떤 줄거리가 아니었다. 배수아가 서술하고 있는 문장 자체에서 오는 모호한 분위기와 정체불명의 시공간, 그 속에서 부유하는 인간들의 관계, 그 부주의한 사랑, 찬 겨울바람에 얼어버린 눈물자국을 바라볼 때의 서늘함과 언제 베였는지 모르게 피가 맺혀 있는 피부의 쓰라림 같은 것. 모든 것이 훅 불며 날아갈 듯한 덧없음. 소설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바로 이렇듯 허허로운 말로 밖에 표현할 길 없는 것들이었다. 그녀의 소설은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이라는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읽으면서 보고, 보면서 느끼고, 느낀 다음에는 사라져 버려 꿈같은 감촉의 여운만이 남겨져 있는. 주인공인 나는 이모의 딸인 연연과 같은 집에서 자라나고 아버지의 연인이자 자신의 사촌인 연연의 죽음을..

흔해빠진독서 2008.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