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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내 안에 남자가 숨어있다》, 2000, 이룸.

우리는 성적으로 명랑쾌활한 이탈리아인도 아니고 바커스의 축제에 참가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비록 은밀한 감동에 떨었던 순간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감동을 우리 인생의 전면에 내세우지는 못한다. 그러나 왜 언제나 반드시 완전무결해야 하는가. 또는 완전무결을 지향해야 하는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인정받을 필요가 없는 부분에서는 자유롭게 비위생적이 되거나 비상식적이 되어도 된다. 그것은 완벽한 기호의 문제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털어놓고 용서를 바랄 필요도 없다. 혹 그것 때문에 죄의식과 수치심으로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의 몫이다. 그러나 그대, 고통 하나 없는 완전한 인생을 진정 원하는가? 상처 없는 관계를 원하는가? 하나의 비밀도 가지지 않기를 원하는가? 죽을 때까지 마음 아플 일이 없기를 바라는가?..

이승우, 《그곳이 어디든》, 현대문학, 2007.

자연의 운동은, 엄격한 규칙과 질서를 내부에 숨긴 채 무질서와 무작위의 외양을 보인다. 반면에 사람의 손이 닿으면 아무리 무작위로 어지럽게 흩어놓은 것 같아도 어딘가 정연한 질서의 외양이 나타난다. 자연의 운동은 자연스럽지만 자연을 흉내 낸 인간의 운동은 자연만큼 자연스럽지 않다.(133~134쪽) * 감각이 날뛰는 한 누구도 평화로울 수 없는 법이다. 날카롭게 벼려질수록 성가신 것이 감각이다. 죽은 자가 왜 평화로운지 말 할 수 있다면 세상살이가 왜 성가신지도 대답할 수 있다. 감각은 살아 있다는 징표이면서 모든 불화들의 근거이다. 평화로운 자는 감각을 잃거나 버린 자이다. 살아 있는 채로 감각을 잃거나 버리는 일이 가능한가? 하고 질문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 아니다. 그러나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