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무언가 절실히 결여된 듯한 느낌은 내가 진정 무언가를 여실히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일까, 아님 그렇게 느끼도록 내가 나를 강요하기 때문일까. 다시 말해서, 그러한 감정은 발열체처럼 내 안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 외부에서 나에게 흘러들어오기 때문일까. 차가운 방안에 .. 어느푸른저녁 2008.10.21
남도기행 생애 처음으로 전라도 땅을 밟고 왔다. 전라남도 순천이라는 곳이었는데, 울진에서 출발해서 거의 여섯 시간 가까이 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차에서 본 전라도의 풍경은 경상도와는 사뭇 달랐다. 일단 도로가 시원스럽게 뻗어 있었고 넓은 평지 덕에 시야가 탁 트여서 오랫동안 차를 타고온 피곤을 조.. 어느푸른저녁 2008.10.18
산책 오후 세시쯤 산책을 하러 나갔다. 삼 주 만에 보는 예천은 조금 들뜬 분위기였다. 어제 삼거리에서 내려 다리를 건너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수많은 플래카드들이 오늘도 그 자리에 걸려있었다. 그것들은 다리를 거의 둘러싸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전신주와 전신주 사이에 걸려 있는가 하면, 커다.. 어느푸른저녁 2008.10.12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 발령 동기들을 만날 때면 나는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그들은 그들만의 고민과 직장 생활의 어려움 등을 토로하지만 나는 그들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항상 겉돌기만 한다. 몇 마디의 응대와 짧은 발언이 전부인 지극히 단순한 대화. 아직 그들과 더욱 친해지지 않아서일까. 나는 가끔가다 만나는 그들.. 어느푸른저녁 2008.10.09
누런 나무에게 - 이성복 누런 나무에게 이성복 인제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어야 하는데, 자꾸만 이게 되는 그런 기막힌 경험을 이 나무들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왜 잎은 매냥 똑같은 잎이고, 그런데도 열매는 왜 매냥 똑같은 열매인지 마흔 지나고, 쉰 지나고 허연 살비듬 눈부시게 날리는 예순을 코앞에 두고도 나무들.. 질투는나의힘 2008.10.05
순수의 이면 어린 아이가 가진 그 천진무구성은 때로 나에게 악마성으로 비춰질 때가 있다. 아무 것도 겁낼 것 없고 모든 것이 자신의 안방처럼 편안하여 눈치볼 것이 없으며, 모든 것들이 호기심의 대상인 아이들의 순수성. 그것은 나로하여금 종종 공포스러울만치 잔인한 화를 치밀어 오르게 한다. 나는 분명 아.. 어느푸른저녁 2008.10.05
선 며칠 전 인터넷을 개통하기 위해 기사를 불렀다. 전화로 어디어디 앞으로 나와 있으라고 말한 후 20분 쯤 지나자 기사가 도착했다. 그는 마른 체형에 어울리는 날렵함과 숙련됨을 가지고 두꺼운 전기선과 연장통, 사다리를 차에서 꺼내들고 내 자취방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그리고는 선이 연결될 수 .. 어느푸른저녁 2008.10.02
오스카 와일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일신서적출판사, 1992. 「알고 나면 끝이야. 불확실한 것이야말로 매력이 있는 거지. 안개는 사물을 멋지게 보이게 하지 않는가?」 「길을 잃을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길은 똑같은 종점에 도달하지. 이봐, 글래디스.」 「그렇다면요?」 「환멸이라는 종점이야.」 「환멸이야말로 내 인생의 출발점이이에요.」(311쪽) * 나를 파멸시킨 것이 나의 아름다움이다―내가 기도하며 원했던 아름다움과 젊음이 파멸의 근원인 것이다. 이 두 가지만 없었더라도 내 생애는 오염되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젊음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새파랗게 젊은 미숙한 시기란, 천박한 기분과 병적인 사상의 시기가 아닌가. 어째서 나는 젊음의 옷을 몸에 둘러 버렸단 말인가? 젊음이 나를 망쳐 버린 것이다.(332~333쪽) 기억할만한지나침 2008.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