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996

진중권,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휴머니스트, 2008.

오늘날의 상상력은 기계공학, 정보공학, 유전공학이라는 테크놀로지의 뒷받침을 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상상력은 미디어 이론가 빌렘 플루서의 말대로 '기술적 상상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은 상상과 현실 사이에 놓여 있던 질료의 저항을 점점 더 무력화시키고 있다. 상상이 질료의 저항 없이 곧바로 현실로 전화하게 된 것이다. SF는 더 이상 문학의 장르가 아니다. 그것은 아예 현실의 조건이 되어버렸다. 드디어 상상력이 힘이 되는 시대가 왔다. '상상력의 혁명'은 이미 시작되었다. 미래의 생산력은 상상력이 될 것이다.(9쪽) * 완전히 우연적인 예술이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 우연히 발생한 여러 경우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은 어차피 예술가의 과제로 남기 때문이다. ..

결핍

라면으로 점심을 때우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들고 집을 나왔다. 책을 반납하고 마트에 가서 일주일치의 식료품을 샀다. 별로 산 것도 없는데 삼만 원 정도가 나왔다. 꽤 무거운 봉지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토요일 오후였다. 토요일 오후인데도 거리엔 사람들도, 차도 없었다. 비가 올 거라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하늘이 잔뜩 흐리고 바람이 제법 거세게 옷깃을 파고 들뿐, 비는 내리지 않았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세상이 온통 회색빛이었다. 오른손에 든 봉지를 왼손으로 바꿔 든 후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무심코 오른손 바닥을 들여다보았는데, 붉은 선이 가로로 두 줄 선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는 손을 입에다 가져다 대고 호, 불었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

어느푸른저녁 2008.04.26

아멜리 노통브, 《배고픔의 자서전》, 열린책들, 2006.

내 배고픔을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은 분명히 해두자. 음식에 대한 배고픔일뿐이었다면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게 있을까? 음식에만 배고픈 게? 보다 광범위한 배고픔의 징표가 아닌, 단순한 밥통의 배고픔이라는 게 있을까? 배고픔, 나는 이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