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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한 자들의 고통

어떤 문장도 삶의 진실을 완전히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어떤 사람도 상대방을 완전히 정확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표현되지 못한 진실은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고통을 느낀다.(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중에서) * 속 서래의 서툴지만 명료한 한국어와, 해준의 쉽게 표현하려고 노력한 한국어의 대화를 떠올리니, 문득 신형철의 속 저 문장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서로 하게 되는 '헤어질 결심'은 결국 정확하게 사랑받지 못한 자들의 고통이 아니었을까.

어느푸른저녁 2022.07.10

헤어질 결심

'마침내' 을 보았다. 처음엔 이포의 안개처럼 몽환적인 영화인가 싶었는데, 마지막 장면까지 보고나니 너무나 '꼿꼿한' 영화였다. 희미한 안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꼿꼿한 서래(탕웨이)의 마지막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해준(박해일)이 서래를 좋아한 이유처럼 나는 이 영화가 좋아졌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이 영화가 사람의 '심장'이 아니라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이란, 버지이나 울프의 말처럼,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전적으로 의존하는, 참으로 신비로운 기관'이 아닌가. 안갯속처럼 잔상을 쉬 알 수 없는 영화였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때로 어떤 헤어질 결심은 깊이 사랑했다는 사실의 반증이..

봄날은간다 2022.07.10

별을 따다 주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별을 따다 주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숲 해설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정말 손을 뻗으면 만져질 듯, 푸른 별이 빼곡히 떠 있었다. 간간히 바람이 불 때마다 별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별들의 춤. 그렇게 푸른 별의 물결 속에 잠시 서 있었다. 다들 별들의 푸르름에 취해서였을까? 아니면 별을 따다 줄 누군가를 생각하는 중이었을까? 숲 해설사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는 이 없었다. 나는 문득, "나 자신에게 저 별을 따주고 싶은데요?"라고 말했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푸른저녁 2022.07.09

오로지 목소리로 너에게 갈 것이다

*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 아직까지 내게 '낭독회'라는 건 낯선 문화다. 한 번도 참여해보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냥 혼자 책을 읽는 것과 어떻게 다른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냥 혼자 책을 읽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독특한 형태의 만남일 거라는 예감이 든다. 그것은 오로지 목소리로 너에게 닿겠다는 의미이기도 할 테니까. * 제주도에 다녀왔지만 돌문화공원에는 가보지 못했다. 2019년 10월의 제주도에는 배수아도,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도, 제주도의 돌도 다 있었구나.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나는 아무것도 확신하거나 확답하지 못한다), 언젠가 또 제주도에 가게 된다면 그곳에 가보게 될까? 하긴, 제주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돌문화공원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 실은 배수아 ..

어느푸른저녁 2022.07.08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그대가 아무리 나를 사랑한다 해도 혹은 내가 아무리 그대를 사랑한다 해도 나는 오늘의 닭고기를 씹어야 하고 나는 오늘의 눈물을 삼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 뿐, 이제 이룰 수 없는 것을 또한 이루려 하지 말며 헛되고 헛됨을 다 이루었다고도 말하지 말며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질투는나의힘 2022.07.05

타오르는 녹색과 검정의 초상

제주도를 다녀왔다. 이번 여름은 제주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느낌이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육중하게 밀려드는 두텁고 습한 공기와 바람이, 그곳이 다름 아닌 제주도임을, 그리고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절절하게 상기시켜 주었던 것이다. 나는 오래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천천히 그 습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렇게 하면 이 습하고 더운, 제주도 특유의 날씨에 더 빨리 적응할 수 있다는 듯이. 처음부터 이번 여행은 여러 가지 이유로 그리 내키지 않았다. 거의 반쯤 떠밀려 간 여행인 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도라는 것에 위안을 삼을 수도 있으련만, 이번에는 어쩐지 그런 마음마저 들지 않았다. 이렇게 설레지 않는 여행이 있었던가? 나는 떠나기 전부터 피곤할 거라는 생각에 지친 기분마저 들었다. 이건 내 안의 ..

토성의고리 2022.07.03

세상 최초의 아침

지금 밝아오는 이 아침은 이 세상 최초의 아침이다. 따스한 흰빛 속으로 창백하게 스며드는 이 분홍빛은, 지금껏 단 한번도 서쪽의 집들을 향해서 비춘 적이 없었다. 집들의 유리창은 무수한 눈동자가 되어, 점점 떠오르는 햇빛과 함께 퍼져가는 침묵을 지켜본다. 이런 시간은 지금껏 단 한번도 없었다. 이런 빛도 없었으며, 지금 이러한 내 존재도 아직 한번도 없었다. 내일 있게 될 것은 오늘과 다를 것이며, 오늘과 다른 새로운 시선으로 채워진 눈동자가 내일 내가 보는 것을 자신 속에 담아낼 것이다.(185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 페소아를 읽다보면 때로 그 의외성에 놀랄 때가 있다. 그의 불안, 체념, 상실, 고통, 모순, 불가해한 모든 것들이 결코 절망에만 닿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을..

불안의서(書) 2022.06.20

범죄도시2

며칠 전 아버지가 갑자기 내게 물었다. "요즘 범죄도시2가 그렇게 재밌다면서? 관객이 천만 명 넘었다고 하던데." "천만이 넘었다고요? 요즘 다들 그 영화 이야기를 많이 하긴 하던데... 천만이 넘을 줄은 몰랐네요."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오늘 를 보았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았을 테지만, 어쨌거나 영화는 내 개인적인 취향과는 별개로 일단 재미가 있었다. 하긴 재미가 없었다면 천 만이라는 관객이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도 오랜만에 재미있는 영화를 봤다며 좋아하셨다. 영화를 보고 나니 왜 이 영화가 천만이나 넘는 관객을 동원했는지 알 것 같았다. 재미라는 건 참으로 주관적인 느낌이므로, 당연한 말이지만, 저마다 그것을 느끼는 부분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영화를 보기 전에 ..

봄날은간다 2022.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