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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잘 읽었어요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시집을 펼친다. 툭, 떨어지는 종이 조각 하나. 뭔가 싶어 보니, 십 년도 더 된, 누가 쓴 것인지도 기억나지 않는(그저 짐작만 할 뿐인) 짧은 메모 한 장.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비가 와서 기분이 정말 좋아요. 책 잘 읽었어요." 메모를 접어 다시 책갈피에 꽂아 둔 후, 시집의 제목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제목은 다름 아닌 . 사랑이라니! 예나 지금이나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어쩌면 시집의 진정한 기능은 따로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푸른저녁 2022.07.28

지울 수 없는 얼굴

냉정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얼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불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무심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징그러운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그윽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따뜻한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내 영혼의 요람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샘솟는 기쁨 같은 당신이라고 썼다가 지우고 아니야 아니야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썼다가 이 세상 지울 수 없는 얼굴 있음을 알았습니다. - 고정희, 전문

질투는나의힘 2022.07.28

외계+인 1부

를 보았다. 나는 대체적으로 책이나 영화 같은 것을 볼 때 되도록이면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려고 하는 편인데, 그래서인지 몰라도(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요즘 이 영화에 쏟아지는 이상하리만치 잔혹한 비판은, 영화를 보고 온 지금 내겐 의아함을 넘어서 이 영화를 음해하려는 모종의 음모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 했다. 너무나도 별로라는 리뷰를 많이 보았고, 보고 온 사람들의 반응도 시큰둥하여 나 역시 별 기대 없이 영화를 보러 갔다. 그렇게 수많은 악평을 보고 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화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내가 직접 보고 판단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감독의 전작에 대한 믿음도 어느 정도 있었다(최동훈 감독의 전작들에 내가 그리 열광하지 않았음에도 불구..

봄날은간다 2022.07.26

어느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고 내 영혼은 우는 아이 같은 나를 달랜다 그때 나는 갑자기 나이가 들어 지나간 시간이 어린 무우잎처럼 아리다 그때 내가 기억하고 있던 모든 별들은 기억을 빠져나가 제 별자리로 올라가고 하늘은 천천히 별자리를 돌린다 어느날 애인들은 나에게 편지를 썼으나 나는 편지를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쓰러지고 바람이 불어오는 사이에 귀를 들이민다 그리고 - 허수경, 전문(『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창비, 2001.)

질투는나의힘 2022.07.22

토로하다

강물은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고 너는 네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 - 최승자, 중에서(『즐거운 일기』 수록) * 시인은 스스로 강을 이뤄 흘러가야만 한다고 일갈했지만, 나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시간이라는 사소하게 거대하고 무자비한 강물에 몸을 담근 채 흘러 흘러 지금까지 왔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나(그저 흘러가는 대로 두었으나), 그러했기 때문에 그 강물이 나를 또 지금 이곳으로까지 인도한 것이다. 다음 사이트의 플래닛으로 시작하여 다음 블로그(이제는 곧 사라질)를 거쳐 티스토리로 오기까지 내가 한 일이라곤 그저 자리를 옮기는 것뿐이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그것은 이 블로그도 마찬가지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지금까지 꽤 오랜 시간 블로그를 없애지 ..

어느푸른저녁 2022.07.14

최승자, 《즐거운 일기》, 문학과지성사, 2021.

궁창의 빈터에서 거대한 허무의 기계를 가동시키는 하늘의 키잡이 늙은 니힐리스트여, 당신인가 나인가 누가 먼저 지칠 것인가 - 중에서 * 오늘도 암스테르담엔 노란 햇빛 비치고 플로렌스에선 그리운 꽃들이 피어난다. 언제나 가볼 수 있을까 죽음다운 죽음이 환히 비치는 곳으로 너의 웃음이 시원한 사이다 한 잔으로 쏟아지고 우리의 고질적인 사랑이 영화처럼 쉽게 끝났다가 심심하면 또 영화처럼 쉽게 시작될 수 있는 곳으로. - 중에서 * 가거라, 사랑인지 사람인지,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 중에서 * 슬퍼하기 위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 그러나 모든 기억하는 자들의 머리 위로 밤은 오고 나는 나..

나에게 매혹적인 이야기를 좀 들려줘요

그리하여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한 사람이 내게로 몸을 돌리고,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면서, 매혹적인 이야기를 좀 들려줘요, 하고 말했을 때, 일생 동안 오직 고요히 침묵만 하고 있던 수백 수천의 작은 종들이 비로소 내 안에서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의 은빛 투명한 나방들이 날갯짓을 시작했다. 은은한 울림이 밀려가고 밀려왔다. 격한 파도가 되어 부풀었다가 부드러운 거품처럼 아래로 꺼지기를 반복했다. 한 사람이 내게 말했다. 나에게 매혹적인 이야기를 좀 들려줘요. 내 안에서 영국식 뒷마당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며 오랜 물 위로 떠올랐다. 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영국식 뒷마당으로 들어갔다.(배수아, 중에서, 『밀레나, 밀레나, 황홀한』 수록) * '나에게 매혹적인 이야기를 좀 들려..

어느푸른저녁 2022.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