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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통 자체보다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그 의식을 더욱 고통스러워했다

"내 느낌의 강도는 내가 느끼고 있다는 의식의 강도보다 항상 더 약했다. 나는 고통 자체보다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그 의식을 더욱 고통스러워했다."(184쪽,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중에서) 문득 페소아의 를 펼친다. 그렇게 우연히 펼쳐진 페이지를 읽는다. 읽자마자 저 문장을 발견한다. 나는 오래전에 이 책을 읽었으나 오늘 처음으로 읽는 것 같다. 는 참으로 이상한 책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매번 다른 문장들이 말을 건넨다. 나는 그렇게 매번 다른 문장들에 사로잡힌다. 페소아라는 '마력'에 사로잡힌다. 결코 과거가 될 수 없는 페소아라는 이름에. "나는 내 것이 아닌 인상으로 살아간다. 나는 체념을 남용하는 자이고, 내가 나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매번 다른 이가 된다."(184쪽) 그렇..

불안의서(書) 2022.06.18

Lana Del Rey - brooklyn baby(feat. 'Maurice')

* 내가 언제 를 보았지? 아무튼 그때는 무척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오래전에 보았으므로, 나는 이 영화 속 음악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는데, 위 영상에 쓰인 라나 델 레이의 음악은 마치 영화의 사운드 트랙이라고 생각될 만큼 잘 어울린다. 나는 혹시나 싶어 이 음악이 나온 시기를 찾아보았는데, 영화가 1987년에 제작되었고, 음악은 그보다 한참이나 뒤에 나온 것이었다. 영상을 보고 있으니 오래전 보았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난다. 나는 엉뚱하게도 이 영상을 보고 세월의 무상함과 그 무상함을 극복하는 것이 또 영화가 아닌가 하는 이중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영화 속 이십 대의 휴 그랜트를 보고 있으니 지금의 휴 그랜트의 모습이 떠올랐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세월의 무상함이 느껴졌지만..

오후4시의희망 2022.06.11

페터 한트케, 《세잔의 산, 생트빅투아르의 가르침》, 아트북스, 2020.

지금 내게 떠오르는 예는 모두 풍경화들이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아름다운 침묵의 공간, 위협이 도사리는 반수면 상태와도 같은 풍경. 특이하게도 그런 그림들은 모두 연작으로 그려졌다.(19~20쪽) * 나는 누군가와 함께 동행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궁리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혼자인 것이 행복했다. 나는 '그 길'을 걸었다. 그늘진 도랑에서 '그 시냇물'을 보았다. 나는 '그 돌다리'에 섰다. 거기 바위의 균열이 있었다. 소나무들이 있었고, 옆길에 줄지어 선 모습이었다. 길의 끝에는 까치 한 마리가 커다란 흑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나는 나무 향기를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영원히". 나는 걸음을 멈추고 메모했다. "무엇이 가능한가 - 바로 이 순간에! 세잔의 길에는 침묵."(40~41쪽) * 타인의 ..

한강 “혐오는 숨 쉬는 공기속에…직면하지 않고 질문하지 않는다면 위험”

서울국제도서전에서 4년 만에 대중 앞에 나선 소설가 한강 인간은 고통을 느끼는 존재이기에 서로 연결 막연한 낙관 대신 실낱같은 희망을…살아있는 한 빛을 향해가며 싸워야 글 쓰는 것이 나의 할일…다음 작품 집필 중 “혐오는 아주 가까이 있어요. 숨쉬는 공기 속에 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 요즘 고민을 많이 합니다. 절망할 때도 많아요. 하지만 공기 속에 흐르고 있는 혐오를 직면하고 그것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면 혐오와 절멸은 이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로 2016년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이 오랜만에 독자들 앞에 섰다. 4일 서울국제도서전이 진행중인 서울 코엑스에서 한강은 ‘작별하지 않는 만남’을 주제로 강연했다. 장편소설 의 한 구절에서 주인공 경하가 제주 4·3 당..

날것의 무언가가 나를 치고 가기를

어린 시절 동네 어르신이 마실을 올 때마다 할머니가 그이를 향해 "바깥이 소삽하오. 얼렁 들어오시오."라고 중얼거리듯 내뱉던 말에서 묻어 나오던 떨림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당신이 쓰던 소삽하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을 지녔다.(···) 그 한 가지는 '바람이 차고 쓸쓸하다'이고 다른 한 가지는 '길이 낯설고 막막하다'이다. 바깥이란 그런 곳이다. 바람이 차고 쓸쓸한 날이 아니어도 낯설고 막막하며, 낯설고 막막하지 않더라도 바람은 차고 쓸쓸하다.(123쪽, 손홍규, ) * 책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왔다. '소삽하다'와 '허우룩하다'. '소삽하다'는 바람이 차고 쓸쓸하다, 길이 낯설고 막막하다는 뜻이었고, '허우룩하다'는 매우 친하게 지내던 사람과 이별하여 텅 빈 것같이 허전하고 서운하다는 뜻이..

흔해빠진독서 2022.06.06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이제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일에 대해서, 내가 어렸을 때, 내게 그늘을 드리웠던 모든 상황들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상처에 대해서, 고통에 대해서, 슬픔에 대해서 이제는 다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말을 꺼내기 전까지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아무런 감정의 동요 없이, 이제는 담담히 말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와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기 위해 카페에 갔다. 늘 마시던 커피가 나왔고, 우리들은 늘 그렇듯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다. 아무런 맥락이 없는 이야기들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하고 있었으므로, 갑자기 왜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일 것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푸른저녁 2022.06.04

이혜경 외, 《누구나, 이방인》, 창비, 2013.

그곳은 내 생애 가장 넓고 밝고 높은 방이었다. 그 방에서 보내는 시간을 나는 좋아했다. 정전이 잦은 저녁 어스름에 촛불을 켜놓고 방 안과 방 밖이 같은 밀도의 어둠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는 순간이 좋았다. 아침마다 동쪽 창 아래 놓은 침대에 누워 눈은 뜨지 않고 정신만 뜬 채로 햇빛에 오래 몸을 담그고 있던 순간도 좋았다.(86쪽, 김미월, ) * 몽골에 도착하고 나서 한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계획하지도 않고 실천하지도 않고 반성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위안이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경이로운 날들이었다. 나는 하루에 마흔여덟시간을 가진 사람처럼 살았다. 천천히 먹고, 오래 자고, 천천히 생각하고, 이따금 밖..

어쩌면 당연한 일

SNS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러내지 말라는 충고 영상을 보았다. 인터넷에는 내가 작성한 기록을 삭제하더라도 어딘가에는 남아 있어 그것이 악용될지도 모르기에 그럴 수 있다 쳐도, 실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대부분 내 이야기를 하지만 - 어쨌거나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이고, 나는 내가 아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으므로 - 대화를 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내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요즘, 보다 편하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에서 벗어났다고 해야 할까. 어차피 사람들은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고, 간혹 내 말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대화가 끝나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금세 잊기..

어느푸른저녁 2022.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