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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하는 인간

언제나 그렇듯 통증은 나를 고립시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 속에 나는 갇힌다. 통증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간으로부터,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다.(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중에서) * 코로나에 확진되고 오늘이 격리 마지막 날이다. 처음 자가 키트에 양성이 나왔을 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내가? 내가 양성이라고?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는 정말 끝까지 걸리지 않을 줄 알았다. 나는 정말 집과 일터 이외에는 거의 돌아다니지 않은 것이다. 병원에 가서 신속항원검사를 하기 전까지도 내가 양성임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곧 그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하나 둘 걸리기 시작하는데 내가 ..

어느푸른저녁 2022.05.04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롭겠지만,

정보라의 『저주토끼』를 읽었다. 그는 책의 말미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여전히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 내가 이 소설집에 실린 열 편의 소설을 읽으면서 하나같이 말하고 싶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음을, 나는 작가의 말을 읽고 깨달았다. 쉽게 희망을 말하지도 쉽게 절망에 빠지지도 않는 것. 나는 작가의 이 세계관이 마음에 든다. 우리는 너무나 쉽..

흔해빠진독서 2022.05.02

정보라, 《저주 토끼》, 아작, 2017.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업은 그 어느 때보다 호황이다. 지금과 같은 삶을 계속 산다면 나도 언젠가 할아버지처럼 죽어도 죽지 못한 채 달 없는 밤 어느 거실의 어둠 속에서 나를 이승에 붙들어두는 닻과 같은 물건 옆에 영원히 앉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저 창가의 안락의자에 앉게 될 때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자식도, 손자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방문을 닫고 완전한 어둠 속에 홀로 선다. 이 뒤틀린 세상에서, 그것만이 내게 유일한 위안이다.(33~34쪽, 「저주 토끼」 중에서) * "자기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그녀는 뛰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몰랐지만, 가느다란 목소리..

저녁의 어스름 속으로

오늘은 월요일. 월요일은 같은 일을 하더라도 다른 날 보다는 좀 더 힘겹게 느껴진다. 그래서 월요일의 퇴근은 평소보다 더 홀가분하다. 그렇게 홀가분한 기분으로 집에 오는데 오늘부터 아파트 지하주차장 바닥 보수공사를 한다는 안내를 받은 기억이 났다. 그래서 이중주차를 하거나 차를 다른 곳에 세워두고 오라는 안내멘트를 들었던 것이다. 나는 현장 사정이 어떤지 몰랐으므로, 일단 아파트 지하에 댈 곳이 있으면 대고, 없으면 지상이라도 어디 댈만한 곳을 찾아보자 생각해서 아파트로 들어갔다. 헌데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이미 막히기 시작했다. 먼저 퇴근한 차들이 아파트 내 주차할 곳이 없어서 다시 돌아 나오느라, 들어가는 차량과 얽히고설켜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재빨리 회전교차로를 돌아서 밖으로..

어느푸른저녁 2022.04.25

내 것이 아닌 말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혼자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 무엇을 그리도 열심히 중얼거렸던가. 내 것이 아닌 말들, 내 것이 될 수 없는 말들, 결코 어디에도 가 닿을 수 없는 말들을. 참으로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하지만 부끄러움만이 오로지 내 몫이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나는 과거에도 부끄러웠고, 지금도 부끄러우며 앞으로도 부끄러울 것임을. 그것이 바로 나 자신임을.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홀로 중얼거리고만 있었던 것이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결국 부끄러워질 거라는 사실을 그때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어느푸른저녁 2022.04.25

가까스로, 인간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라는 부제가 붙은, 『눈먼 자들의 국가』를 읽었다. 나는 이 책을 책장에 꽂아 놓고 오랫동안 읽지 않았다. 가끔씩 눈으로 쓸어보기만 했을 뿐.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다. 다만 이 책을 볼 때마다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무거움 때문에 선뜻 읽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좀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정말 그랬던가? 아니, 그조차 확실치 않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정말 알 수 없는 채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 언젠가 읽으리라. 나는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현실이 되었다. 나는 결국 그것을 읽었고(읽을 수밖에 없었고), 오래전 그날이 떠올랐고(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읽는 동안 몇 번이고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감정 때문에 책을 잠시..

흔해빠진독서 2022.04.20

김애란 외,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앞으로 '바다'를 볼 때 이제 우리 눈에는 바다 외에 다른 것도 담길 것이다. '가만히 있어라'는 말 속엔 영원히 그늘이 질 거다. 특정 단어를 쓸 때마다 그 말 아래 깔리는 어둠을 의식하게 될 거다. 어떤 이는 노트에 세월이라는 단어를 쓰려다 말고 시간이나 인생이란 낱말로 바꿀 것이다.(14~15쪽,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에서) * '바다'가 그냥 바다가 되고 '선장'이 그냥 선장이 될 때까지, '믿으라'는 말이 '믿을 만한 말'로, '옳은 말'이 '맞는 말'로 바로 설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15쪽, 김애란,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중에서) *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 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