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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벚꽃이 핀 나무 아래를 걸었을 뿐인데

낮에 점심을 먹고 햇살이 환한 벚꽃길을 걸었다. 사무실 가까이에 가볍게 산책할 수 있는 벚꽃길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생각하면서. 어제보다 오늘 벚꽃이 더욱 활짝 피어있었고, 그 때문인지 걷는 사람도 더 많이 보였다. 같이 간 동료들과 나는 활짝 핀 벚꽃을 보면서 연신 좋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중 한 명은 사무실에 들어가기 싫다고 했다. 그냥 이대로 쭉 벚꽃길을 걸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그녀의 말에 맞아, 맞아하면서 손바닥을 치고 웃었다. 그러다 문득 알 수 없는 의문이 들었다. 단지 벚꽃이 핀 나무 아래를 걷고 있을 뿐인데, 이게 왜 이렇듯 특별한 일이 되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벚나무 아래서 이렇듯 함박웃음을 짓고, 왜 이렇듯 발걸음은 가벼워지는 것일까. 단지 벚꽃이 핀 나무 아래를 걸었을..

어느푸른저녁 2022.04.08

카프카를 읽는 사람

우연히 유튜브를 보다가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애플TV 드라마인 의 원작 소설 작가 이민진의 하버드대 강연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 소설에 대해서 들어서 알고는 있었으나 아직 읽지 못했고, 인터넷 뉴스와 유튜브를 통해 그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최근 상영을 했으며,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사실을 접했다. 그리고 애플TV의 파격적인 홍보의 일환으로 드라마의 1화를 무료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1화를 다 볼 수도 있었지만 중반쯤 보다가 그만두었다. 드라마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일단 애플TV에 가입하지도 않았거니와, 보려면 전체를 한꺼번에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작 소설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쓸데없는 강박도 작용했을 것이다. 작가의 강연은 몇 년 전에 ..

어느푸른저녁 2022.04.03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아침이슬, 2008.

(뱅쿼) 시간의 씨앗 속을 너희가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어떤 낱알이 자라고 어떤 낱알이 안 자랄지 알 수 있다면, 내게 말해 다오, 은총을 구걸하지도 그대들의 증오를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니. (15~16쪽) * (맥베스 부인) 오 결코 태양은 그 내일을 보지 못할걸요 당신 얼굴은, 여보, 무슨 책 같군요, 사람들이 수상한 내용을 읽을 수 있는. 세상을 속이려면, 그때그때 어울리는 표정을 지으세요. 환영하는 내색을 담아야죠. 당신 눈에, 당신 손에, 당신 혀에. 순진한 꽃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 밑은 뱀이어야 하고요. (27쪽) * (맥베스 부인) 그렇다면 어떤 짐승이 이 계획을 제게 발설하라고 당신을 꼬드겼나요? 당신이 발설을 해치웠을 때, 그때 당신은 사내였어요. 그리고 당신 이상이 되기 위해, 당신은..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배수아의 「아멜리의 파스텔 그림」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만났다. '많은 가슴 설렘과 비극에의 예감이 있었지만 결국은 그녀의 생에 아무런 결정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문득 달력을 보았고, 오늘이 3월의 마지막 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결정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결정적인 것처럼. 진은영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봄, 이라서 눈에 더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맨살에 닿는 아련하고도 따사로운 바람의 손길이 조금은 관능적인, 이 봄이라는 계절. 충만한 생명력으로 가득한, 하지만 어딘가 아플 것만 같은 희미한 예감으로 가득한, 이 이상한 계절의 푸른 머리를 밟고 있다.

어느푸른저녁 2022.03.31

배수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문학동네, 2021.

생은 내가 원하는 것처럼은 하나도 돼주지를 않았으니까. 부모의 사랑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학교에서는 성적도 좋지 않고 눈에 띄지도 않는다는 늘 그런 식이다. 그리고 자라서는 불안한 마음으로 산부인과를 기웃거리고, 남자가 약속 장소에 나타나기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리면서 연한 커피를 세 잔이나 마신 다음에 밤의 카페를 나오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어느 날의 한적한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에서 눈앞을 지나간 고양이는 검은 고양이가 된다.(23~24쪽,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중에서) * 모든 사람이 거의 예외 없이 시집가고 장가간다고 해서 그러한 봄바람 같고 한여름 날의 폭우 같은 사랑을 가졌었나, 그러지 않았으리라고 집 떠나기 전날의 나는 확신하였다.(29쪽,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

아무래도 좋을 일과 그렇지 않을 일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내 태도가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곤 한다. 나를 위한다는 그 호의를 차마 거절하지 못해, 늘 내키지 않는 결정을 하고, 후회를 하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주위 사람들까지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을 나는 왜 되풀이하는 것일까? 나의 우유부단함이 스스로를 괴롭힐 것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면서도. 오늘도 어떤 결정 때문에 나는 짧은 시간이지만 극도의 혼란을 겪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참으로 이상하게 보일 것이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야?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게 날카로운 눈빛으로 누군가 묻는다. 그래서 그것을 하겠다는 거야 안 하겠다는 거야? 그제야 나는 내가 그에게 보낸 짧은 쪽지의 의미가 무척이나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

어느푸른저녁 2022.03.29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독서의 즐거움에 대해서 말하자면, 뭐니 뭐니 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읽을 때일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어떤 종류의 책을 좋아하는지조차 알 수 없겠지만, 이것저것 조금씩 읽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좋아하는 글의 형태와 종류를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게 될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게 되면 당연히 그 작가의 모든 책을 읽고 싶어질 것이고, 그것을 하나씩 읽어나갈 때의 희열을 알게 될 것이다. 천재 혹은 자신의 재능만 믿고 설치는 자는 결코 즐기는 자를 당할 수 없듯이, 천재가 아니고 별다른 재능도 없는 나는, 즐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하지만 즐기는 것도 결코 쉽지만은 않아서, 일단 순수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을 찾는 것이 생각보다 어렵..

어느푸른저녁 2022.03.27

윤희에게

너는 네가 부끄럽지 않다고 했지. 나도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 언젠가 내 딸한테 네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용기를 내고 싶어. 나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거야. 추신 - 나도 네 꿈을 꿔. - 영화 중에서 * 마치 잘 짜인 단편소설을 한 편 읽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오래전에 본 영화 도 생각났다.(영화 속 배경 도시가 오타루인 데다가 '편지'가 중요한 매개로 등장한다) 감독도 아마 그 영화를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이 영화를 보고 눈과 편지,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꿈을 꾸는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가족에 대해서. 가족은 서로에게 족쇄와 억압으로 작용하기도 하지..

봄날은간다 2022.03.26